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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얗고 포근했던 그 날

by NINA

엄마는 엄마가 없었다.

기억하지 못했는지,

기억하지 않으려 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엄마는 세명의 동생이 있었다.

엄마는 엄마가 무엇인지 모르는 엄마가 되었다.


어릴 적 가족여행을 자주 다녔다.

여덟 살 쯤이었을까.

아빠가 오래된 차를 몰고 우리를 태웠다.

그 차를 샀는지 빌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난과 부의 개념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경상도의 작은 마을에서 출발해 한참 달려 도착한 곳.

밤은 깊었고, 엄마와 아빠는 조심스레 말을 주고받았다.


"여가 맞나.."


내비게이션도 없던 때,

두 어른은 커다란 종이지도를 펼쳐 도로표지판을 찾아 헤맸다.


낯선 골목,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밤길을 헤매는 엄마아빠의 긴장감.

잠에 취했던 나도 그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작은 건물 앞에서 아빠가 말했다.


“됐다. 드가자.”


엄마는 잠든 오빠와 나를 깨워 차에서 내렸다.

자정쯤이었을까, 새벽 1시였을까.

세상에 이렇게 깊은 밤과

이렇게 추운 동네가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작은 단칸방.

엄마는 우리를 씻기고 재웠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다시 우리를 깨웠다.


"니나 가자."


우리 집에서는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법이 없었다.

나에게는 "니나!"

오빠야는 "지후이!"

누가 경상도 말이 애교 많다 했던가.


엄마는 내 발을 작은 운동화에 구겨 넣고 아이젠을 채웠다.

밖으로 나간 순간,

나는 태어나 처음 보는 세상을 마주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득뽀득,

세상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눈이 휘둥그레져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온 세상을 눈에 담았다.


포근해 보이는 하얀 세상에 당장 뛰어들고 싶었지만

엄마 아빠는 “빨리 가자”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여기다!” 하는 말이 얼른 들리길 바라며,

숨이 차도록 걸었다.


그리고 하산길 (설악산이었다)

드디어 자유가 주어졌다.


뿡이의 산책줄을 풀어주면 이런 모습일까.

나는 미친 듯이 눈밭으로 달려 나갔다.


새하얀 눈 속에 발을 담그고 헤엄치듯 허우적허우적.

허리까지 푹 빠지는 눈의 포근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내 몸에 닿았다가 금세 사라지는

새침한 고양이 같은 눈발들.

크림이라 할 수도, 밀가루라 할 수도 없지만

그 둘과 닮은 하얀 세상 속에서

나는 온전히 행복했다.

내 흔적을 부드럽게 품어주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충만함을 느꼈고,

그것이 곧 '좋아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새하얀 눈 속에서 새하얀 패딩을 입고

포니테일을 단단히 묶을 채

얼굴은 벌겋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광대가 잔뜩 솟아오른 표정으로

사진 속에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멀미가 나를 덮쳤다.

아빠 차에 달린 산도깨비 방향제 향이 싫었다.


행복했던 눈의 기억이 흐려지려 할 때

엄마가 무릎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에는 없던 그 손길이

나를 가장 편안한 잠으로 이끌었다.


엄마는 엄마가 없었기에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지만

그날 그 손길은 내 마음 깊이 닿았다.


새하얀 눈과

엄마의 따뜻한 손길이 만들어준

내 최고의 하루였다,


그 이후로 누가 나에게

"너는 뭘 좋아해?"

라고 물으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눈!!"


하지만 사실은

눈보다 더 좋아했던 건

그 눈 속에서 마주한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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