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에도 오지 마!

by 소소한 특별함
돌이켜보면 엄마는 엄마여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내게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젊어서부터 엄마는 ‘나는 절대 자식에게 신세 안 질 거다’ ‘아파도 혼자 요양원 가서 죽을 거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김애란, 안녕이라 그랬어 중에서


엄마가 얼마나 오랜 시간 딸들에게 최선을 다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나 역시도 엄마로서 매번 매 때 최선을 선택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내가 나의 엄마를 의심하듯, 나의 자식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1살 터울 언니는 존재만으로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나는 자라는 내내 아들이 아님을 한탄하셨다.

그건 내가 개구쟁이이거나 말썽꾸러기여서가 아니다.

시대적으로 '아들'을 출산하지 못함은 며느리의 잘못이고 호된 시집살이를 버텨야 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거침없이 자기표현을 하는 언니와 다르게 나는 착한 딸이었다.

여자임에도 집안의 남자노릇을 하느라 전구를 갈고, 필요하면 망치질도 거뜬히 해냈다.

그럼에도 '언니를 이겨먹으려 한다'는 말로 언니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는 나의 발목을 잡으셨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나는 너네 언니랑은 못 산다"

"나는 이다음에 살아도 너랑 살 거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어린 나이에는 너무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말이다.

언니보다 내가 우선이야! 하며 우쭐댈 수 있었다.

나는 이 말의 뜻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 진위를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었고 그때 느끼는 배신감은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너무 컸다.


엄마에게 큰 딸은 어렵고 불편했다.

외모와 성격까지 아빠를 꼭 빼닮은 언니는 엄마가 어쩌지 못하는 대상이었다.

자식이 부모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어도 엄마는 받아들이고 수긍했다.

돌이켜보면 언니의 모습과 아버지를 동일시하지 않았나 싶다.

반해서 나는 착한 딸이었기에 편했다. 아니 다루기 쉬웠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위 말의 뜻은 눈치 보이는 큰 딸 말고 아무 소리 없이 묵묵히 따라주는 쉬운 작은 딸과 사는 것이 편하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딸 둘의 결혼 이후 내가 잠시 아이와 함께 살았던 때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혼자 지내고 계신다.

그러나 작년! (어쩌면 재작년?) 나랑만 살겠다던 엄마는 모진 말을 뱉으셨다.


"장례식에도 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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