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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드 입은 코끼리 Oct 27. 2024

솔의 만남 이후, 뮤즈 하지만 꿈이었을까?

솔과의 만남들이 하나둘씩 환상같이 느껴진다.

솔은 작은 집에서 나왔다. 빨랫감으로 엉망이 된 집. 낡은 주전자는 삐익삐익 소리를 내며 울다가도, 텔레비전 소리에 묻혀 다급한 소리가 사라졌다. 그런 집에 사는 솔은 바닥에 널린 옷 중 하나를 주워 입어 보았다. 유명한 브랜드의 티셔츠였다. 스투키? 스카티? 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요즘 예쁘다고 해서 샀지만, 정작 자기 마음에는 썩 들지 않았다. 이어지는 솔의 면바지 찾기 프로젝트. 면바지는 구겨지지 않아야 동사무소에서 미움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하나의 깔끔한 면바지를 입고, 솔은 오늘도 출근을 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토속적인 그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눈에 그려지는 파도와 그 소리에 맞장구를 치던 거제도 시골 동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동사무소에서 면사무소로 바뀌는 신기한 시골 동네. 그곳에 있는 바(bar). 바에 비치는 노란 불빛과 화창한 코스모스들. 밤을 꼬박 새웠어도 체력이 이상하게 넘쳐났다. 눈가에 번진 마스카라도 있었지만, 그녀의 침착함은 여전히 독하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푸른 눈을 보며 감시하듯 지켜보다가 민원대를 떠났다. 오늘은 야근 근무가 있는 날이라 더 피곤한 솔이었다. 강한 체력도 저녁 7시가 넘어가자 흐물흐물한 계란처럼 녹아내렸다. 솔은 천천히 커피를 타 마셨다. 스틱을 돌리는 손길이 꽤나 전문적이었다.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다섯 번 돌리고 나니 가루들이 다 녹았다.


가루가 물에 완전히 녹았을 때, 솔은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컴퓨터 화면에 비친 얼굴은 노랗게 뜬 듯했지만, 머리는 여전히 찰랑거렸다. 햇빛을 머금고 태어난 서양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부산, 서울 같은 대도시와 어울리는 여자는 아니었다. 촌스러운 잔주름이 있고, 그녀의 귀걸이는 가짜 큐빅으로 장식되어 싼티가 나 보였다. 그런 귀걸이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지자마자, 솔은 귀걸이를 빼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콧대와 눈매가 더욱 강조되어 보였다. 그런 자신을 그려줄 바다. 바다에게 나는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프린터기가 아니라 그림의 영감이라면 나는 하늘나라에 정착할 수 있는 날개 돋은 천사가 될지도 모른다.


저녁 9시. 이제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텅 빈 동사무소. 동사무소는 창백한 백열등 덕에 따스함이 전혀 없었고, 먼지들이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사르르 내려앉았다. 그 먼지들 사이로 기침과 잡음이 섞인 공기를 청정해 보겠다고, 공기청정기 두 대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솔은 동사무소의 문을 잠그고 나왔다. 그리고 시원한 갈매기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그는 바다가 그리웠다. 파도치는 바다도, 그림 그리는 바다도 그리웠다. 바다가 자신의 그림을 그려줄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몇 달을 기다려도 바다에게 연락이 오지 않자, 그는 다시 프린터기의 일만 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밤마다 맥주 두 캔을 마시며 주워온 옷을 세탁할 줄 아는 어엿한 자취생으로 변해 있었다. 그날 따라 본 야구 경기는 시원찮은 타자들로 가득해 재미가 없었다. 솔은 겉트름을 하며 맥주 캔을 꾸욱 눌렀다. 그때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왠지 뇌리 속에서 바다의 전화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보세요?" "오랜만이에요, 솔님. 잘 지내셨어요?" "아뇨, 그렇게 잘 지내진 못했어요." "아, 그러셨군요."

한동안의 침묵. 솔은 킁킁거리며 대화를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했다. "이제 날이 풀리고 있어요. 겨울이 가고, 봄이 오네요." "그런 날에는 바다가 잔잔하게 일렁여서, 그림 그리기 딱 좋아요. 혹시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세요?" "다음 주 토요일이라..."

솔은 휴대폰 일정표를 찾아봤지만, 빈칸뿐이었다. 둘러댈 말도 없이 말했다. "네, 괜찮아요." "그럼, 4대 부속섬 앞에서 만나기로 해요. 솔님, 그리웠어요.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툭, 전화가 끊겼다. 바다는 숫기가 없어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은 것이 분명했다. 솔은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멍하니 바라보며, 다음 주 토요일에 입을 옷을 미리 고르기 시작했다. 아직 열흘이나 남았지만 말이다.


둘은 다음 주 토요일, 화창한 날에 만났다. 그 화창함 속에서 바다 사이로 작은 섬들이 보였다. 날이 거무스름해져도 보이는 작은 섬들, 바로 4대 부속섬이었다. 그 섬들 앞에서 둘은 마주했다. 섬들 사이사이로 잠기는 바닷물은 돌섬 표면에 자국을 남겼다. 그 자국에 따라 출렁거리는 바다. 솔은 낮 시간에 술을 마시지 않아도, 바다만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제 이름은 송화예요." 솔은 고개를 돌렸다. "제 이름이 너무 여성스러워서, 바다라고 소개했지만 오늘은 이제 밝혀야 할 것 같아요."

송화는 스케치북을 꺼내고, 솔에게 몇 장의 그림을 건넸다. "저는 솔님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서 순수함을 느꼈어요. 솔님과 함께 거제도를 그리고 싶은데, 허락해주실 수 있나요?"

송화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가 용기를 내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술집에서의 가벼운 만남을 주선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단지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솔이 그의 뮤즈가 되어, 연작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솔은 그런 송화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그림의 대상이 되고 싶었지만, 화가의 손끝에서 탄생할 자신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무례해 보일까 걱정이 되어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솔은 몇 번 끄덕이며 허락했다. 그러자 송화는 점잖게 솔에게 바다를 향해 서서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솔의 뒷모습을 그리겠다고 했다. 솔은 자신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바다와 함께 어우러진 풍경 속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더 감각적이라고 생각했다.


송화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수많은 밤 동안 이 순간을 상상해왔기 때문에, 지우개 한 번 쓰지 않고 스케치를 끝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물감으로 채색을 시작했다. 물감으로 그려진 솔은 희미하게 붉은 태양과 어우러져 있었다. 그녀는 그림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다음 그림이 기다려졌다.


총 4시간 동안 바다만 바라보았다. 솔은 바다의 잔잔함에 졸리기도 했지만, 자신이 뮤즈라는 생각에 집중했다. 완성된 작품을 보고 나니, 자신의 포즈와 바다는 천상의 조합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송화는 솔에게 이 그림을 선물해 주고 싶다며, 다음부터 자신이 그린 그림들은 자신이 소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그림이 유일한 선물이 될 것이라며, 그림의 소유권에 대해 다투지 말자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솔은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분위기에 심취해 있었기에, 그저 모든 것에 "네"라고 답할 뿐이었다. 송화는 그림의 아래쪽에 오늘의 날짜와 자신의 이름을 적고 그림을 건넸다.


"앞으로 우리 자주 만나요. 시간이 될 때, 거제도와 함께요." "좋아요. 저도 거제도처럼 뮤즈가 되는 거 맞죠?" "그럼요. 솔님이 제격이에요. 감사합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바에 가서 한 잔 하실래요?"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던 노란색 불빛의 바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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