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 몰츠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1장; 유학
쇄신은 필수다
끼익~
엔진 사이즈 5000cc 대형 오스 모빌(Ausmobil)에서 내릴 때 문짝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게 80년도 중반 미국 엘로우 택시다. 기름이 지금의 물보다 훨씬 싸던 그 당시 미국에선 리터당 300원도 못했다. 그러니 미국차는 무조건 엔진이 켰고 기름을 아낀다는 생각을 하면 고객 요구의 ( Customer’s Needs) 위반이었다. 나는 그런 80년도 중반에 미국에 있었고 그 당시 내가 방문하려는 회사, 코닥의 원료를 가지고 새 생산품을 만드는 담당이어서 나는 지금 공항을 빠져나와 코닥이란 회사 연구원을 만나러 가고 있는 중이었다. 영어도 서툴렀고 미국에 대해서 아는 것 하나 없는 상태에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공항에 올라탄 택시는 뒷좌석이 엄청 넓어 보였다. 뒷좌석에 올라탈 때 창문 쪽에 앉기가 좀 그렇고 해서 얼른 뛰어올라 정 중간에 자리 잡고 앉았다. 뭔~가 빠진 느낌이 있었지만 그 본능적 직관을 무시했다. 그 당신 운전자도 안전벨트가 차는 게 습관이 아니었던 시대였으니 뒤에 탄 내가 벨트를 착용 하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바로 후회했다. 이 차가 우회전 좌회전을 하는 동안 그 커다란 뒤 좌석에 돌돌 말린 내 몸통은 사기꾼 손아귀에 주사위 굴러가듯이 좌와 우로 뒤집기에 바빴다. 그래도 서류 가방은 가운데 끼고 양쪽 문짝을 왔다 갔다 하며 불쌍하게도 그놈이 가방이 바닥에 떨어질까 봐서 앞가슴으로 움켜쥐면서 양쪽 발로 사력을 다해서 버티 기고 있었다.
“헤이 여보세요 좀 천천히 가실까요?”
내가 토종 악센트가 아님을 눈치챘던지 운전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피던 시가 연기만 빠금 거리며 백미러를 통해서 뒤쪽을 향해 쏘아보았다. 나는 혼자서 뇌 깔렸다.
( 아눔이 내가 영어 못한다고 무시하나? )
속이 많이 불편해하고 있었다. 이거 그냥 지나가려니 내가 쪽이 팔리는 것 같고, 그렇다고 한마디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입에 붙지도 않은 영어로 한판 하자 하면 녹녹지 않을 거란? 이런저런 생각으로 내 머릿속은 혼잡해하고 있을 그때 자동차는 끼익~ 소리 내면서 정지했고 처음으로 그 눔의 운전사는 얼굴을 나를 향하며
“다 왔슈 손님”
처음 봤자. 그 운전사 얼굴을 아주 똑똑히……
미국인들은 대개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실상을 어린놈들이 많았다. 내 눈에 중년쯤 되어 보였는데 구레나룻가 무성하게 턱과 얼굴에 듬성듬성 가리고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이 친구가 말로 듣던 완전 시골 촌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운전하던 매너와 전혀 다르게 씩 웃는 얼굴이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또 고민이 생겼다, 이놈의 운전사를 팀을 줘야 돼? 말아야 돼? 그런데 다 왔다고 얼굴을 내밀 때 처음으로 씨~악하고 웃는 얼굴에서 뒤에서 혼자 부글 부굴 거릴 때처럼 생각했던 그런 나쁜 놈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일단 차에 내리려고 차문을 열었다. 자동차 뒷문에 기름을 안 쳐서 이상한 소리를 냈고 차문은 몸으로 밀면서 열고 나와야 했다. 그렇게 코닥이란 회사에 정문에 발을 딛게 되었다. 처음 내 눈에 들어온 회사의 첫인상은 내가 상상했던 회사보다 더 커서 크기에 난 잠시 압도돼 있었다. 여기 이스트먼 코닥은 로체스터란 도시에 있었고 방금 내가 내린 공항이 로체스터 국제공항이었다. 공항은 2층 정도로 판잣집 건물이라면 이 회사의 사이즈는 정문부터가 다른데 이 끝에서 저 끝이 가름할 수 없을 정도를 넓었다. 아마 로체스터 모든 도시 사람들이 여기서 먹여 살려도 될 듯이 엄청 크게 보였다. 압도된 장면에 나는 잠시 운전사를 잃고 있었다. 나중에야 정신 차리고 나는 지갑에서 얼른 달러를 챙겨주고 나머지는 팀은 가지라고 했다. 운전사는 내 뒤로
“땡큐”
란 외마디만 남기고 왔던 길에서 유턴을 급작스럽게 하더니 다시 먼지를 뒤로 뿌리고 휭~ 달아나듯 가버렸다.
“그놈의 싸가지 하고는…”
나는 혼자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곧 회사 안내원은 운전수와 정 다른 세련된 얼굴이었지만 콧소리가 심하게 내는 것이 이 또한 영 싹수없는 냉랭한 로봇 옴으로 내게 물었다.
“어찌 오셨나요”
“네~ 네~ 오늘 연구 1실 의 조이지 씨와 예약이 되었습니다”
이 회산 안내원이란 놈조차 하도 건방져서 나도 모르게 잘 봐달라고 굽신거리고 있었다. 이 회사는 처음으로 발을 딛는 손님의 기분을 상당히 위압감이 들게끔 위에서 지시하듯이 방문객을 대접했다. 원래 이 회사의 이름은 이스트만 코닥인데 우린 칼라 필름 만드는 코닥 회사로 알고 있다. 정문 안내원에게 가서 방문팻지를 받고 있으니 조금 기다리니 조지가 나와서 배웅했다. 조지는 오리지널 백인이고 나도 평균 키인데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다. 뉴욕 북부 사투리가 조금 섞여있고 매너는 아주 완벽한 미국 신사였다. 그전에 만난 적이 있었기에 그리 서먹 서먹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 친구는 경계선을 철저히 지키는 친구였다. 공장도 구경하고 새 제품에 대한 이야기하고 시내에 나가서 점심도 함께 하면서 많은 시간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가면 보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인상적인 대화가 있었다. 내 미국 이름은 존이었다.
“존 이것 알고 있어나요? 내 아버지도 여기서 같은 부서에서 정년퇴직했었어요”
이렇게 이 친구가 자기 가족사 근무를 말할 때였다.
“물론 나도 여기 정년까지 일할 거고”
나는 속으로 엄청 부러웠다. 이 회사는 봉급을 많이 주어서 부러운 것이 아니고 대대 손손 일할 수 있는 직장이어서 부러웠다.
“내 아들도 근무할 겁니다 졸업 후엔”
아우~ 이건 나와 정 반대였다. 언제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나와 너무 반대였다. 이렇게 미국 직장은 나가라는 통보 – 어떨 때 이메일 어떨 때 인사과 직원이 나타나면 - 떨어지면 그날로 박스 하나에 소지품 챙겨 가지고 나오는 게 관행이다. 여자들은 더 쉬웠다. 아침에 출근할 때 들고 온 백에 자기 소지품 넣고 나오면 출근할 때랑 뭐 하나 달라진 모습이 없었다. 미국 직장의 끝은 이렇게 쉬웠다. 인사과 직원이 당신 앞에서 예산이 어쩌고 하다면 오늘이 마지막 날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 회사는 알다시피 칼라필름을 만드는 회사로 1976년에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이 90%였고 연간 매출이 필름 한 개로 100억 달러가 넘었다. 이스만 코닥이 PET 필름의 원료까지 만들고 있어서 내가 만들려던 제품에 이 회사의 원료 PET를 공급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부럽던 회사가 2000년대 초반에 디지털카메라 시장이 나왔을 때 새로운 흐름을 무시했다. 왜 이렇게 무시했냐 하면, 이 회사는 그 당시 너무 잘 나가고 있었고, 승승장구할 만큼 오랫동안 존속할 회사처럼 보였으며 당시만 해도 무려 1,100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다른 어느 경쟁업체가 기술론 따라올 경쟁업체가 없었다. 그러니 남의 뭐라고 조언하다 하더래도 다 헛소리 같았을 것이니 남의 이야길 들을 필요가 없었고, 그러니 겸손하기도 어려웠을 테지만 그런데 문젠 이런 교만은 아주 사악한 전염병과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경영진의 생각이 말단 직원까지 쉽게 전염시켰다. 아까 전 안내원처럼 고객인 나에게도 너무 쉽게 갑질을 해댄다. 경영진의 실수지만 엄밀히 말하면 CEO의 실수이다. 그 당시 실패를 했으니 이 책에선 그의 이름을 알아도, 기재할 필요조차 없는 무용지물로 취급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잘해서 상황을 잘 대처했었다면 지금까지도 책을 쓰고 강연 일정이 일 년 전까지 잡혀있는 전 GE의 CEO 잭 웰치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 한 사람이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조직이라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 한 사람이 회사를 살리는 사람인가? 죽이는 사람인가? 그 중요한 한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인가? 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패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깨어 있음으로써 모든 일이 오픈되고 그 조직 안에 있는 모든 가능성의 문을 열어 놓게 만든다. 결국 그 풍성했던 전성기가 채 30여 년이 지난 2012년에 참혹하게 코닥이란 회사는 파산한다.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더 이상 조지는 그 회사에서 일하지 못했다. 물론 코닥에서 무상 장학금을 받고 로체스터 대학을 내와서 이스트먼 코닥에 근무하려 된 그의 아들도 다른 직장으로 알아봐야 했다. 더 이상 대대 손손 이어지던 특혜는 사라졌다. 덩치 큰 미국 대기업도 변신을 중단하자 도태했지만 그게 잠재성을 굳게 닫고 잘난척하던 교만 때문이었다. 우린 꾸준히 변신을 하지 않는 이상 성공이란 없다. 내가 제때 변하지 않으면 남이 날 변화하게 한다. 그리고 그 꾸준한 변신은 어디서 나와야 하냐면 자신의 자아 쇄신에서 나온다.
지금의 마이크로소프트이나 애플보다 더 컸던 코닥이 사라졌다면 그 안에서 일하던 수십만 직원도 사라지고, 조지의 아들의 미래도 동시에 사라진 것이다. 많은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이 제때 쇄신을 못하니까 고초를 당하게 된 결과이다. 문제는 그놈의 쇄신이란 게 말로만 쉽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잘 못하면 패가망신뿐만이 아니라 오랜 기간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어서인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준다. 그런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결정전까지 많은 올바른 정보도 필요하다. 요점을 말하자면, 이런 쇄신에는 두려움과 도전 사이에 깊은 긴장관계가 있다. 그러나 주요한 사실은 내가 바꾸지 않으면 남이 날 바꿔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쇄신은 필수다. 그렇기 때문에 쇄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더 이상 놓아 눌 순 없다.
켄터키 발령
미국 직장 초짜 생활이 몇 년 지난 후에 동부에 있는 화학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미국 중부 켄터키 발령이 났다. 맨 처음엔 내가 무슨 선택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고민하는 척도 해봤는데 사실 나에겐 선택의 여지없었다. 그래서 늘 하듯이 잘못되었을 때 막판이 어찌 될지?부터 생각해 보았다. 이게 이젠 나의 버릇처럼 되었는데, 일단 이렇게 해놓으면 자신감도 생기고 더군다나 위에 기재한 몰츠 박사의 상상력 때문에 현실 적응이 더 잘 됐다. 그 방법은 지금 하려고 하는 새로운 일이 잘 못되었을 때 담 단계로 떨어질 궤도( Orbital)를 미리 직시해 보는 것이었다. 해보니 내가 하고 싶었던 음식이나 만들면서 대형 식당에서 일하면 될 것 같았다. 아직 젊고 영어도 잘하니 못되더라도 뉴욕에서 미국 식당이나 한식 식당을 하면서 요식업으로 돈도 벌 수 있겠다는 맘이 생겼다.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은 나에게 큰 힘이 되곤 했다. 그랬더니 이번 일로 망조가 난다 하더래도 죽을 일은 발생하지 않겠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이거 아니래도 이런 배짱이 쉽게 생길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이미 1만 킬로를 날아와서 여기 생면부지 한 땅에 왔는데 이 미국 땅에서 중부 그것도 내륙 지방으로 고작 1천 킬로 정도 이전하는 게 큰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실패할 거란 생각보다 잘되는 거란 생각으로 바꿨다. 결국 걱정이 줄어들다 보니 몰츠 박사의 상상이 더 쉽게 몰입하게 되었다; 아하~ 켄터키에서 내 농장에 말을 키우는 상상, 카우보이 모자 눌러쓰고 말에 앉아서 로우프를 휭휭 돌리는 상상, 켄터키 시가를 나의 길게 자란 수염 사이에 찡겨 넣고 담배 연길 휙~하고 내뿜는 상상, 켄터키의 유명한 문사인 (켄터키의 특유 밀주)로 제조하는 등의 상상을 했다. 한동안이 지나선 두려움보다 재미있을 거란 생각까지 해개 되었고, 마음은 점점 안정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 아주 잘된 일이었다. 이제부턴 뜬 꿈 없이 날아온 발령장이 나를 더 이상 흔들지 못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솔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몰츠 박사의 상상을 다시 재 가동시켰다. 가본 적 없는 켄터키, 영화 속 총잡이들이 켄터키 금괴를 턴다는 그 켄터키가 두려움의 대상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래서 이사 비용을 챙겨서 미국 중부로 가는 그레이하운드에 몸을 실었다. 그 와중에 50개 주중에서도 생활 수준이 아주 열악했던 켄터키에선 새로 선출된 주지사가 켄터키에 큰 부흥을 꿈꾸고 있었다.
1997년쯤에 처음으로 켄터키 주지사, 폴 패튼( Paul E. Patton)은 북부 주에서 공장들을 이주시키기 위해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는데 그것이 10년간 세금을 면제 주겠다는 법령과 공장 부지를 거의 헐값에 매도하겠다는 공표했다. 참고로 폴패튼은 켄터키에서 태어나서 거기에서 자라면서 사업까지 켄터키에서 하던 자라 그는 켄터키를 떠나 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힐빌(미국말; 촌놈)이었다. 그는 석탄산업으로 돈을 벌었고 그 당시 서민을 대표로 하던 대통령, 빌 클린턴과도 친했다. 갑자기 이 표고문에 미국의 산업들은 세금과 노동조합 때문에 버거워하던 북부 쪽 기업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볼만했었는데 우리 회사가 이 공표가 떨어지기도 전에 켄터키에 공장을 짓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곤 졸지에 동부 쪽에서 일하던 나를 프로젝트 책임자로 꼽았다. 나는 미국에 집도 절도 없던 때여서 켄터키이던, 텍사스이던, 앨라스카이던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이런 조건에 부합해서 뽑힌 사람이 바로 나였다. 다른 직원을 보냈다면 아마 전근이란 이유로 퇴사할 거라고 회사가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러다 보니 내가 기니피기(Guinea Pig; 희생양, 실험대상)가 된 셈이었다.
나에겐 어쨌든 봉급도 쪼금 올려준다니 뭐라 딱히 불평할 일도 없었다. 사실 이렇게 내가 선택에 여지가 없도록 회사가 마구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내려 보내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당시까지도 영주권이 없었다. 미국에 살면서 그 영주권이란 게 있으면 별게 아닌데 그게 없으면 이것저것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다른 회사로 이직하려 해도 스폰서링에서 걸렸다. 스폰서링을 서 주는 회사는 이민 고용자 때문에 자기네 회사가 얼마의 매출에, 얼마의 순이익을 내는지?를 이민국 모두 알려 바쳐야 했다. 미국의 90년대였지만 고용주들이 이걸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지금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 법은 더 심해졌다지만, 그 당시도 좀처럼 스폰서링을 서 주지 않았다.
나에겐 멘토를 해주시던 미국 생활을 미리 하신 멘토 박사님이 계셨다. 내 멘토 박사님 만큼은 내려가겠다는 나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다. 미국 생활 중 알게 된 인연이 있었다. 미국에서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정유회사에서 근무하셨던 모 씨의 박사님이 나의 멘토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게 묻곤 했었고 나보다 오랫동안 미국 생활을 했던 그가 미국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물을 수 있었던 유일한 나의 카운슬러였다. 인생을 나보다 오래 사 신분이라서 이런저런 일에 많은 좋은 조언을 주시는 분이었는데 이번엔 나의 멘토조차 한번 시골로 내려가면 다신 주요 도시 쪽으로 올 수 없을 테니 차라리 다른 동부 쪽에 스폰서링을 해주는 회사를 알아보라고 강력하게 말렸다. 그런데 사실 켄터키에서 나는 나의 멘토 박사님이 예상한 것보다 더 혹독한 고생을 했다.
맥스웰 몰츠의 상상 팁 1; 자아 이미지
뇌에는 시냅스(synaps)가 있다. 이 시냅스는 두 개의 신경세포사이에서 전기 및 화학적 신호를 전달하는 곳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움직이는데 핵심역할을 담당한다. 몰츠박사는 상상이 만든 시냅스와 체험에 의해서 얻는 스냅스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상상으로 자아 이미지를 미래로 투영하면 상상만으로 성공한 자가 되고, 상상으로 자아 이미지를 과거로 재투영하면 과거의 상처가 치유된다. 원하던 자아 이미지로 시냅스를 디자인해 두면 미사일이 설정한 값에 의해서 유도되어 날아가듯이 마침내 원하던 자신이 된다는 사이코 싸이버그네팈스(Psycho Cybernetics)를 1960년에 주장했고 그 이후 몰츠박사의 성공법칙은 지난 반세기를 걸쳐서 검증되어 왔다. "위 내용은 [Maxwell Maltz]의 [Psycho Cybernetics]에서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