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스엘 몰츠 성공체험:자아를 깨워라
특허변리사 낙방
“아~ “
“또”
“이렇게 떨어져”
어느 날 유튜브를 보다가 조현증환자를 봤다. 이 사람이 나랑 똑같았서 놀랬다.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처럼 잡은 고기를 풀어 줄 수 없는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 시험을 공부하려는 목적은 쫓겨 다니지도 않고, 남한테 해고당하지도 않는 안전한 직업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생계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자지 우지 된다는 것이 무능해 보여서였다. 그래서 나는 그 걸 어찌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었는데 그게 그리 쉽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동안 미국에서 많은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하다못해 남들이 힘들어하는 라이선스 미국 중개사 자격, 뭐 아니면 보험사 보험인종 무슨 security 안전 뭐 아니면 재무 등등 그리고 프로페셔널 엔지니어 자격증까지 내가 딴 자격증만 해도 이거 저거 합치면 14개 정도가 됐다. 근데 그것들이 다들 나의 생계를 보장하지 못하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분야들이였다. 미국엔 영어가 안 돼서 발을 동동 구르는 한인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자격증을 딴 다음에 그들이 그들의 직업군을 찾도록 도워주는 비영리단체의 자원봉사를 몇 년간 하면서 본의 아니게 생긴 자격증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남을 위해서 일하면서 정작 내가 하고픈, 그러면서 보장되는 직업군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미국 특허변리사였다. 그래서 나는 이 변리사 공부를 계속했었는데 어떻게 커트라인에서 70점이면 꼭 2~3점이 차이가 나곤 했다. 이 시험은 70점이 합격점수인데 평균적으로 붙는 사람들의 점수가 71점에서 70점에서 왔다 갔다 했었다. 이걸 100점 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100점 받지 못하게 답인 것 같은 것과 답 안 같은 것을 혼합하여 넣었기 때문에 그 75% 만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 놨다. 그래서 실상 합격선은 70에서 75점이었으니, 100점은 없었다. 붙은 자와 떨어진 자의 평균 점수 차이는 3 차이였다. 그럼 나는 어떤 땐 1점 또는 어떤 땐 2점 차이로 항상 떨어지는데 이게 사람을 돌게 만들었다. 차라리 50점 차이면 아예 포길 할 텐데 이게 사람이 감질나게 하면서 사람이 병들게 만드는 미치광이 장난이었다.
변호사는 변리사자격증을 따면 특허변호사의 일을 할 수 있기에 남들보다 수입률이 2배에서 3배로 뛰었다. 또 프로페셔널 엔지니어인 경우에 변리사를 가지고 있으면 프로페셔널 엔지니어가 받는 것보다 1.5배 정도가 뛰었다. 해서 나는 서둘러 스타디그룹을 만들었다. 그중에 프로페셔널 엔지니어도 있었고 그다음에 변호사도 있었고, 많이 다른 전공한 사람들도 한땐 의사들도 들어와서 스터디 그룹을 구성해 갔다. 나는 이 스타디그룹이 필요했고, 그들의 초창기엔 내가 만든 스타디그룹이 그들에게도 필요했었다. 새로 시작한 이들은 가입하자마자 나한테 10년간의 자료를 한 번에 다 빼갔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이 사람들이 오는 것만 해도 좋았고 이게 또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미 한인들을 도왔던 경험도 있어서 별 문제로 삼질 않았다. 나는 그냥 오지랖이 넓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돕고, 이렇게 잘 되어 나가는 걸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 아낌없이 주었던 나는 항상 풍족한 마음이었다. 그러다보니 여러 사람들이 들어왔고 들어와서는 내가 오랫동안 수집 정리한 정보를 빠른 시간에 빼간 후엔 떠날 때는 인사도 없이 떠나간 사람도 있었다. 그게 옳은 건지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내 성정이 남을 돕는 걸 좋아해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지만 일말의 외로움을 느끼에 하는 것은 10년간 이렇게 하면서 합격한 친구들은 다 떠나가고 나만 여전히 여기서 덩그러니 혼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실력이 꽉 찬 친구들은 이 스터디클럽에 머물려 있지 않고 바로 떠났다. 나는 실력 있던 그들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나와 같이 머무르지 않고 붙은 즉시 미국 전역으로 흐트러져 갔다. 그러니 나는 항상 새로 들어온 친구들을 영입했다. 새로 들어온 친구들은 새 정보가 정리되어 있으니 좋았지만 내 실력은 그들과 같이 있으면서 늘지 않았다. 그들은 1점 차이로 붙고 떨어지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의 방법에 추가로 자기가 창안한 방법까지 정리하곤 했지만 난 그 정보를 따로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붙으면 떠나곤 했으니 나는 10년을 해도 동일한 수준이고 동네 골목대장일 뿐이었다. 결국 새로 영입시킨 스타디그룹 회원은 내와 동일한 실력이 아니었으니 난 그들의 강사수준이였고, 그들에겐 난 이렇게 하면 떨어지는 걸 보며 주는 묵계적으로 따라서하지 말아야 하는 선배였을 뿐이었다. 스타디그룹은 대등한 실력이 있는 회원들로 구성되었을 때만 도움이 된다는걸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이 변리사 시험 전에 나는 그동안 한인커뮤니티와 연관이 없이 살았었다. 한인커뮤니티와 엮이기 시작하면서 그 한인단체의 한인들이 나를 무척 좋아했다. 한인들이 영어가 딸리는데 나는 암기력이 좋았다. 다시말하면 사진찍어 내듯이 사진 기억력만 좋았다. 생각 없이 그냥 암기만 하는 능력만 있었다. 이게 암기력 때문에 무슨 시험이건 간에 들어가서 시험을 보면 그 문제지를 그냥 그대로 외워 나왔다. 그러니까 300개는 500개는 그냥 외우고 나와서 그냥 그대로 복귀했다. 복귀된 시험문제로 한인들을 가르쳤다. 시험을 붙질 못해서 긍긍 전전하던 사람들이 자격증을 따서 자기 비즈니스를 너무나 잘했는데, 제 실력으로 공부해서 붙은 사람들보다 서 너배가 될 정도로 비즈니스를 잘했다. 이게 나에게도 보람이였다. 그래서 영어가 모라자는 사람 대상으로 보험사, 보험설계사, 재무사, 재무설계사, 증권사, 증권설계사, 그리고 나중엔 중개사 시험을 가르쳐줬다. 그래서 그 한인들이 많은 자격증을 얻는데 일익을 담당했었는데 그때 하나 배운 게 있다. 똑같은 자격증이라도 이게 귀하다 생각하면 거기에서 몰입을 하고 성공을 하는데 이게 같은 자격증이라도 귀하다 생각지 않으면 조금만 어려운 외부환경에 처하면 바로 이 직업을 이전하거나 자기 자격증을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휴지 상태로 놓아지는 걸 보았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지금 뉴욕에서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있고 또 회사를 차려서 회장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울 때도, 남들도 같이 어려웠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을 지나가자 그들은 탄탄 성공한 길을 얻을 수 있었다. 실제 아무거나 하나만 붙잡고 몰입하면 성공한다는 걸 알았다.
변리사 시험도 마찬가지로 시험이 끝나자마 몽땅 문제를 다 외워서 마치 바둑알 복귀를 하듯이 복귀한 후엔 시험 문제들을 모두 분석했다. 또 분석한 건 내가 부모가 준 좌뇌 때문에 취약 분석을 정말 잘했다. 해서 매번 이런 자료는 똑같이 시험을 볼 때마다 우리 팀 스터디클럽에겐 많은 자료를 제공했다. 흥미로운 일은 맨 처음 준비 하면서 봤던 미국 변리사 전문강사가 10년 되니까 그 강사 머리가 까맣었는데 그 사람 머리가 하얗졌다. 이 사람의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나는 꼴방에 쪼그리고 시간을 허송으로 보낸 셈이었다. 이 강의로 안되니까 문고에서 책도 보고 또 어떤 사람의 예상 문제라고 해서 그것도 거의 다 봤고 그다음에 이렇게 제1 강사라는 사람들의 강의도 뉴욕에서 며칠 동안 거주하면서 듣기도 하고 또 그걸 영상으로도 보고 그렇게 공부를 했다.
그런데 결국 나는 안 됐다. 내가 왜 어떻게 10년 동안 미친 짓을 하면서 조현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사실은 내 직업이 따로 있었다. 내 직업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1년 내내 공부하는 게 아니라 시험 보기 전 1개월에서 2개월 정도만 힘들게 밤 2시까지 하면서 10번 시도했던 것이다. 이미 다 공부했던 공부기 때문에 마지막 몇 칸만 하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준비를 하면서 했기 때문에 10년 동안 죽어라 하고 고시방에 앉아서 10년을 있었던 사람들과 좀 달랐다. 조현증이 걸릴 이유가 없었지만 그러나 기분은 10년 간 내리 떨어진 기분은 같았다. 가족을 위해서 하려 했던 안전한 직업군으로 10년이 지나도록 소유하질 못했다. 남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해 왔던 나에겐 10년간 떨어진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10년간 떨어진 나, 그리고 스트레스 때문에 미치 것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맘깊이 이해가 됐다. 그 사람은 조현증이 걸려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가 뼈마디마디가 저려오는 그런 고통이 나에게도 전해왔다. 그리고 헛소리를 하고, 있지도 않는 사람들과 얘기하고, 그런 저런 추한 꼴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란 생각이 들어왔다. 더군다나 또 이걸 계속해야 되나? 하고 짜증도 나었지만 그놈의 집착이란 게 사람을 잡들이고 있었다. 나는 잡힐 물고기를, 지금 일점 차이로 내 손에서 놓아 보내야한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질 않했다. 마치 원숭이가 야자수 안에 먹이를 놓지 못해서 결국 잡히는 이 사달을 도저히 이성적으로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때 필요한 게 용기였는데 이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서버 프라임 여파 때문에 그동안 견디오던 우리 총괄 부서가 2010년초쯤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니 외부에 대한 충돌 그리고 그 안에서의 경제적으로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악독한 사내의 정치 등등으로 내가 있는 부서 천체가 문을 닫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이 부서라는 게 공장이 여덟 개이고 연구소가 한 개였으니 작은 부서가 아니었다. 난 떠나게 된 회사에서 가장 커다란 연구소의 제일 책임자였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회사에 생겼다. 서버 프라임이 터지면서 우리 총괄부서가 문 닫을 때 나는 이 회사의 400여 개의 특허를 만든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이 연구소가 내 관장을 했고 화학공장의 포뮬러는 내가 직접 감당했기 때문에 그래서 미국회사는 특허를 내면 경쟁회사가 모방할 수도 있으니까 남들이 특허 제출을 하면 특허권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특허방지책을 쓰고 있었다. 이건 남이 혹여 유사한 특허를 출원했을 때 주로 소송용으로 사용했었다. 이 절차는 돈도 시간도 많이 절약할 수 있어서 미국회사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나의 그동안의 일은 연구소에서 특허로 만든 후엔 남들에게 알리는 대신 혹여 남들이 특허출원을 못하게 특허방지 등록해왔었다. 그러니 대개 포뮬러는 특허 문헌에서 발췌되지 않는 극비에 속하는 포뮬러 되어 있었다.
이걸 들고 다른 회사를 가면 다른 회사의 경쟁 업체에선 분명히 내가 있던 회사가 문을 닫았으니 나를 더 높은 자리를 주겠지만 이 회사는 연관성 있는 다른 제품의 마케팅도 동시 폭망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기도 하지 않고 남도 못하게 하는 것이 회사 방침이었는데 본사가 볼 때 내가 제일 큰 가시였다. 어느 날 본사 HR 부 이사가 부지불시에 내 방에 쳐 들어왔다. 난 이자를 본 적이 없었다. 누구냐고 물었더 자기 명함 하나를 내 책상에 던져 주면서 내 컴퓨터로 포뮬러를 프린트해적이 있냐고 물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린트에 포뮬러 한 장이 프린트에 걸려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래”
“ 그런데”
“그래서”
그는 말없이 나갔다. 그린 곤 나에게 본사 HR 이름으로 고소장을 보냈다. 회사 기밀을 컴퓨터로 프린트했단 이유를 대면서, 이 건 내가 늘 하던 일이었고,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그놈이 들어왔을 때 우연히 프린트에 결처 있었던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었다. 나는 원통했다. 그러나 그는 의도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아이디어와 특허를 만들었는데 그걸 사장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사장시키면서 조건 하나가 다른 경쟁 업체를 가지 않는 대신 2년간 봉금을 주기로 했다. 나는 이 봉급을 야금야금 쓰면서 다른 생각을 했던 것이 바로 특허변리사 준비였다. 그래서 어느 날 졸지에 특허 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이 특허 공부가 나를 지금 10년 동안이나 이렇게 끌고 있는 거다. 여기에 캐비어가 있었는데 내가 만약 이 계약을 어기고 경쟁회사에 가면 소송을 계속 진행하는 조건이 있었으니 그걸 이미 재판소에 접수만 해놓은 상태가 되고 진행 하진 않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내가 포뮬러를 프린터에서 프린터 했단 말도 안 되는 증거로 이미 사인해 준 계약서와 함께 재판소에 접수되었고 의문점이 생기면 진행한겠다는 일종의 엄포였다. 그런 걸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라고 했다.
그게 특허청의 백그라운드체크에 노출되어 있었다. 어느 날 미국 특허청 윤리위원회에 있다는 자가 자기가 누구라고 설명하면서 전화가 왔었다. 이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묻고 또 물었다. 느껴지는 직감이 아주 안 좋았다. 미국 특허청은 윤리 문제에 극도로 예민한 조직이었음을 이미 과거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나는 항상 1, 2점의 차이로 낙방시키는 걸 알아챈 나는 미특허청대상으로 호소문 접수까지 했다. 그렇게 계속되는 이 시험 중에 이렇게 불안한 요소들이 즐비해있었어도 돈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다른 회사로 이력서를 제출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선 이런 이유로 변리사 시험을 중단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10년이 지났다.
그 동안 공부할 때 물론 몰츠의 공부법도 사용해 보았다. 내가 맥스웰 몰츠의 공부법으로 충분히 공부하고 그다음에 그걸 가지고 몸 전체에 입력하는 후 다음엔 자고 나서 휴식한 다음에 예상 문제까지도 만들었는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가 생겼다. 여기선 같이 문제를 만들 인물이 없었다. 시험 문제를 만들 출제관이 누군지를 알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사 문제 의원일 테니까 어떤 특정 인물을 잡아 낼수가 없었다. 거기서 내가 실수했고, 이번에 얻은 것은 두 번 세 번 떨어지면 이런 고시는 한계가 온 것인데 너무 안일하게 대쳐했었다. 나의 한계는 뭐냐면 외우는 것이 장점이었는데 그것이 약점이었다. 너무 쉽게 외우니까 그 안에 내용에 깊이 들어가서 그걸 가지고 이해하려고도 못 했고 그걸 핵심을 잡아서 다른 판례에 적용하는 능력이 모자랐다. 분석력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이 판례를 뒤저가면 하는 공부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냥 기억 사진만 있는 상태가 됐던 것이다.
그런중에 우리 애들을 위해서 대입을 할 준비 중이 시간 되었었다. 나는 우리 얘들의 성장과정과 늘 함께 했었기 때문에 SAT 문제지를 만들어서 우리 애들을 가르치다가 나중엔 다른 아이들을 가르쳤고 또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게끔 노력을 했다. 그다음에 아예 학원을 만들었다. 여기 동부에서 지금 세 군데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또 이번 고시도 시험을 실패했다.
“또”
“그래도”
돌아와서 본시험이 또 낙방을 할 때마다 실망을 어찌 줄지 않았다. 계속 반복되는 기분 나쁜 감정은 차라리 때마다 증폭하는 듯이 나타났다. 이런 일이 하면서……어쩌나 또 이쯤 되면 이젠 이력이 날만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매번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표정만 지었다. 이게 지금 몇 번째인지 머리에서는 거의 터져나갈 정도이다. 나의 시험 결과가 나오자마자 나는 거의 미친사람처럼 난리가 분통이 나서 정신을 혼미한 상태가 되곤 했다. 이게 아마 천지가 터지기 전에 혼동 상태에 아니면 TNT가 폭발하고 공중에 내 몸이 떠있는 상태 정도였다. 이 시간부로 내가 10년 동안 걸려서 특허변리사 시험이 안 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목을 죄어 들게 했다. 내가 지금까지 회사의 그 어려운 프로젝트를 손바닥에 움직이듯이 운영하면서 귀재라는 말을 듣고 살았는데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내 덕에 붙여준 사람이 몇인데 이게 날 발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고 생각하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다. 이것보다 백배나 어려운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 잘난 자존심 하나로 가지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던 나인데 이곳 족쐐에 걸려들어 허수아비가 된 것이 너무 억울했다. 이 허깨비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똑똑하단 말을 듣고 살았던 나는 실제론 그리 똑똑지 못한 인간이였다. 얼른 그런 시도를 그만두어야 했었다. 첫째 해석력은 있느냐? 사진 기억능력만 있어지 깊이 있게 분석력이 모자라고, 둘째 스타디그룹에선 나보다 나은 실력자를 내 곁에 두질 못했고, 셋째 봉급 받고 한가롭게 준비하고 있었고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고 넷째로 미특허청에서 이미 나를 스크리닝 하고 경계 대상으로 잡고 있었으니, 되었다 하더라도 날 또 인터뷰에서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못 놓고 집착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과거 10년간을 미쳐도 아주 남들에게 티도 안 나게 미쳐 있었다. 밤을 새우며 책상에 너무 앉아서 엉덩이에 혹까지 얻는 내가 무엇에 빠져 있는지 관심이라곤 전혀 없던 아내가 그녀가 퀵~ 하고 소릴 지르며 딱 한마딜 날렸다.
“영어도 딸리고”
“안돼 그 정도면 됐고”
“그만 혀~”
아낸 늘 날 초능력자로 보아오던 사람이였다. 난 아내의 돌발적인 도발에 내심 무척 놀라와 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한일은 그만하란 말에 내마음에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났다. 난 그때에 말에 이 정도로 파워가 있는 줄 몰랐다. 나도 많이 지쳐 있었나 보다. 누군가 그만하란 말을 기다리고 있었듯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말도 없이 십 년간 보물단지처럼 다루던 책과 노트 그리고 녹음테이프 모두를 대형 박스에 처넣고 한 시간 떨어진 뉴저지주 환경청에서 일한던 환경 고급 공무원, 잭(Jack)네 집까지 운전해서 그 집 앞에 떨쳐 놓고 돌아왔다. 그 친군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였다. 마지막 떠나는 시간에도 이 모든 자료를 프로페셔널 엔지니어인 내가 친분이 있었던 친한 친구한테 다 떠 맞끼고 온 상태니까 나는 10년간 투쟁을 이렇게 남에게 바톤을 넘겨 주면서 이 악연을 끊고 있었다.
그리고 몇달이 지난후에 프린스톤연구소에 콜이 왔다. 우리 옛날에 프린스톤 연구소와 같이 일하면서 스티브잡스가 발명했던 웨어어블 와치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여름 전에 여름 파트타임을 들어오라고 해서 나는 여름 2개월 동안 그 파트타임으로 일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특허를 공부했기 때문에 특허에 대한 걸 또 알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특허자체가 아니었다. 내 성격이 새로운 걸 만드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고 이런 브레인스톤이 나한테 너무 어울렸다. 이 일이 내가 하고픈 일이었다. 그래서 2개월 동안 들어가서 남의 특허를 도와주고 만들어 주웠다. 아이러니하게 거긴엔 4명의 미국 특허 변리사와 1명의 특허 변호사가 나를 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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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웰 몰츠의 상상팁 4 ; 몰츠의 공부법
무조건 시험준비는 하루 전에 모두 끝낸다. 그리고 잠을 푹 자면서 들어온 모든 정보를 뇌가 아니고 몸에 골고루 축적되도록 충분한 휴식을 거친다. 머리가 맑아진 상태에서 몰츠의 상상력으로 교수를 복제하여 만든다.그리고 종이 한장을 책상에 놓고 이렇게 선정된 복제교수와 함께 나올 예상 시험문제를 같이 출제한다. 예상문제가 적중률이 높도록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만든다. 이렇게 만든 시험지를 시간내에 풀 수 있도록 시험전까지 반복 연습하여 해답 작성 시간을 단축한다. 막상 시험이 시작되면 적중된 문제만 아주 빠르게 답안을 작성을 하고난 후엔 나머지 시간은 적중문제되지 않은 문제에 시간을 배분하여 풀어 간다. 그 때엔 필요에 따라서 복제교수의 도움으로 같이 풀어 갈 수도 있다. "이 아이디어는 [Maxwell Maltz]의 [Psycho Cybernetics]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