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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찬 Oct 16. 2024

*3장 3a.전화 한 통화

맥스웰 몰츠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3장. 회복

낙엽을 태우면서

가을이 훅~하고 들어오면 창문 너머 저쪽에선  엄청난 낙엽이 떨어진다. 오늘도 하이웨이 I-195위엔 손등만 한 낙엽이 하늘하늘 거리며 저쪽 하늘에도 이쪽 하늘에서도 떨어져 댄다. 나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낙엽을 태우고 싶어진다 "이효섭 씨의 낙엽을 태우면서"처럼 갓 볶아낸 커피냄새나 잘 익은 개암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는 착각을 늘 한다. 그리만 될 수 있다면 진부한 가을날 하루가 강열한 햇빛아래서 장작나무 피우던 어린 시절처럼 그 의욕이 다시 일어날테데 말이다.  그런 감성한테 미안할 정도로  여기선 낙엽을 태우면 소방서가 직접 출동한다. 그러니 개암냄새를 맡으려다가 동네에서 쫓겨나기 십상이다.  낙엽을 보면  머리엔  문학적인 글귀가 흐른다지만  실젠 몸을 굽혀 낙엽을 주워 쌓아 올려야 하니 몸엔 땀만 흐른다.  이 일엔 그렇게 낭만적이 란곤 말할 순 없지만 네 머리 기억 속엔 좋은 문장이 한 구절이 땀 범벅을 하고 있는 나를 기쁘게 한다.

        하나, 여기에 우리 아이들이 나중애 커서,  들려줄 낙엽엔 엮인 덕담의 한 구절이 오늘 이 땀을 흘려야 하는 이 노동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추수감사절이 가까워지는 이 가을의  맹렬한 태양아래  낙엽 속에 숨은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나하나 들쳐보기엔 너무나 오늘 저 하늘이 맑다. 여기 미국은 낙엽을 자기 집 앞에 고스란히 쌓아두면 마을 대형트럭이 와서 모두 수거해 간다. 그러니 동네마다 가을 되면 낙엽을 치우기에 정신이 없다. 난 잔디 깎기 전용 52인 대형 트랙터를 샀다. 이 트랙터에 수레까지 붙여 놓았다. 이 동네는  나름 잘 산다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은 한집이  2만 평짜리 저택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애들과 비슷한 아이들이 한집건너 하나씩 있다.   같이 낙엽 줍는 일을 도우면 몇 불씩 협동의 의미로 동네아이들에게 주웠더니 낙엽을 치우는 날은 동네 아아들은 이게 아주 큰 추억이 되는 날이 되어 버렸다.   트랙터를 몰고 가면 아이들은 어느새 구르마에 올라타고 재미있다고 재갈거린다. 낙엽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으면 이젠 동네 꼬마들이 낙엽이 쌓은 산더미 안에 들어가 동굴을 만든다. 애들은 재미있어 이런 동굴을 여기저기 만들곤 한다. 아이들은 낙엽으로 서로에게 뿌려대고, 그위를 뒹굴기도 하고, 혹은 동굴 그 안에 숨기도 한다. 조금 있으면 반드시 어른들이 출동한다. 애들 옷을 털면서 옷이 더러 진다고 나물 하고,  잔소린 쉴 새 없이 하면서  결국 아이들은 어른 손에 끌려  총총이 사라진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낙엽 위에 애들 뿌렷던 요런 저런 추억만 남긴다. 시간이 한참 지나가도 애들 기억엔 이렇게 하잘것없는 것만 남는 건가 보다  돈 들려서 해준 비싼 가족 여행이나 비싼 파티는 꼭 나만 기억한다.  애들은 어려서부터  대학을 들어갈 나이가 되었어도 이 낙엽 얘기만 해댄다. 하여간 가을은 이런 훈훈한 여운을 우리에게 선물로 준다. 10말에는 핼러윈, 11월 말엔 추수감사절, 12월 말엔 크리스마스로 애들은 개학이 시작한 9월 한 달만 넘기면 그해가 가기 전까지 여러 가지 축제, 파티로 이어진다. 그래도  나는 낙엽을 주을 때가 좋다.

 


 전화 한 통화

옛날에도 이런 얘기 있다. 그리고 이게 나의 장인 어르신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골에서도 공부 잘하는 학생을 서울에 보내서 그 학생이 성년이 되어 성공하면 서울에 모든 시골친적을 다 불러들인다. 그러니 우리 가족의 개념은  가족 중에 똑똑한 아들 또는 딸에게 집중 투자를 해서 그 자식이 성공하면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식구들이 같이 그(또는 그녀)의  부가 주는 행복과 즐거움을 나눈다는 가족주의 행복이 있다. 그러니까 "같이 나눈다"라는 뜻에 나는 동의한다.  투자에 대해서 성공의 부를 나누고, 오손 도손 행복을 나누고,  멋있는 성공의 맛을 나누는 것이  내 DNA에 멋있는 삶으로 셑팅되어있다.          

 여기 오랜만에 맨해튼을 나와 보니 뉴욕 맨해튼 33가에서 잡화상 하던 생각이 머릴 스친다.  장인 어르신께서  하시던 사업이 왕창 부도가 나면서  일이 함께 꼬여들기 시작했었다. 한국의 사업이란 게 잘 나갈 때, 덩덩거리지만, 한번 사세가 기울면 모양새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주 형편없었다. 근데 장인 어르신께선 자수성가를 하신 분이라 향상 뭘 엮으실 생각으로 꽉 차 계신 분이었다. 미국 오신 이후에도 이런 생각을 나누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실패라는 것이 참 냉정한 것이었다. 가족들도 장인 어르신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부도 사건은 아주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대책 없이 그냥 미국으로 가셨다. 그리곤 장모님이 이틀이 멀다 하고  큰딸인 아내 한데 매일 힘든 얘길 하는 모양이었다.

 결혼한 지 채 막 일 년 좀 지나서 생긴 일이었다. 그 후로 아내는 날을 어떻게 하든 미국으로 끌고 갈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일에 관한한 참으로 충성스러운 딸이었다. 내가 딸을 낳아서 키워보니 딸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도 미국, 미국 해대니……  참  많은 고민이 많았다. 늦까지  공부를 한다 하는 것이 선뜩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이미 창창할 때 머리도 아니고,  사회생활도 충족할 만큼 자리 잡고 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유학 타령인가? 란 미심쩍은 생각만 들곤 하였다. 아낸  좀 넓은 곳에서 공부하자고 꼬드기지만 나는 넓은 곳에서 살아 보고 싶기는 했었어도 이런 식으로 아닌 것 같아서 결정은 차일피일 자꾸 미루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넓은 세상의 공부도, 드넓은 하늘 아래 일도 아닌  더 중요한 키워드가 내 DNA 안에 있었다.  이 키워드는 앞으로 일어날이 얼마나 혹독할 것인지?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과는  전혀 상관없이 없었다. 좌지우지할 만한 내의 인생의 키워드(Key Word)가  다름 아닌  "의리"였다.  이게 내 운명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난 옛날에 여려서부터 서양 소설 보다 중국 소설에 심취되었는데, 그중 중학교 때 읽은 "수호지"를 보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삶이 나의 목표였다. 동일한 공동체에서 서로를 보호하며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공동체 세상이었다. 그리고 공동체는 필히 가족공동체를 기초로 했었다. 이것은 결혼이란 계약으로 맺는 가족 공동체였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문제를 내가 무시하고 돌아설 일이 아님을 알았을 때  잘나가던 회사도, 한국에서 잘나가는 내 친 형제자매 관계도 잠시 정도는 보류해야 했다.     

일단 힘들다 하니 서울 주변에 있던 내 아파트에서 돈을 빼서 돈을 부치고 있었다, 뭐~ 그러다 보니  하나하나 정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 둘 생각도 했고, 차라리 찔끔찔끔 도와 들리는 것이 도의적으로 큰 사위가 할 도리가 아닌 듯싶기도 하고, 또 이 참에 공부도 할 겸 해서 떠날 마음이 서서히 들어왔었다. 우리 집에서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형과 누나만 내 결정을 먼 거리에서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유학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이 공부가 그렇게 힘든 줄 꿈에도 몰랐다. 수업 시간엔 영어가 전혀 들리지도, 무슨 소린지 잘 몰라서 그 전날 밤을 새워서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는 식으로 공불했다. 그렇게 외우고 나면 수업이 조금씩 귀에 들어왔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도서관 문을 닫는다는 실내 방송을 못 들어서 도서관 안에 갇힌 적도 있었다. 코피를 왕창 쏟고,  심하면  탈장이 되곤 해서 아주 곤욕이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도 책을 필히 끼고 있어야 했다. 내 생애 이렇게 공부랑 인연이  짙은 줄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 했었다.  그리하여 바약으로 첫 번 학기부터 스트레이트 A을 받기 시작했고 그걸 계기로 장학금을 받았다. 그다음다음 학기부턴 기숙사며, 밀플랜,  식사까지 제공받고 조금 한 용돈도 생기게 되었다. 그러니 공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참 다행스러운 일로 유학생들 중  학생비자 가진 학생으로 유일하게 미국 회사에 취직까지 하게 되었다. 취직해서 처음 직장문을 들어갈 때, 다시 처음 왔을 때 잡화상 돕던 회상해 보았다. 참~ 감회가 새로웠다.

      왜 학교로 가야 되었는지?  질문을 지금 받아도 대답이 선득 나오지 않는다. 공부가 좋아서 간 게 아니고, 나에게 남겨 있던 그 작은 터널 끝의 조그마한 빛은 학교로 가서 공부하고 다시 제2의 찬스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남들처럼 유학 와서  좋은 대학교 교수가 되려고 공부했던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결국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게  미국 대기업에서 취직을 했으니 망정이지, 완전히 허공에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 취급도 못 받을 뻔했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 하면 코 끝이 찡하다. 어찌 보면 그 매몰찬 한마디 때문에 한 40년을 줄기차게 살아온 것 같다. 마치 물 위에서 한발 빠지면 다른 한발 옮기고 또 그 발마저 빠지면 또 다른 한발 재빨리 바꿔가면서 말이다. 물 위를 뛰어다녀야만 했었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토지 위에서 아직 본적도 없었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그 역량을 확인하고 굳히면서 살아야 했었다. 결국 그다음 날  책 몇 권 둘둘 말아 쌓아 가지고 학교로  옮겼던 그날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다. 왜 여기 공부하게 됐는지?는 질문 자체가 나에게 아직도 편치 않다.  나에게는  지금에야  고맙게도 생각된다 하겠지만 장모님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생전의 장모님의 말 한마디가 여기 오게 만들었다.  나는 죽은 자와는  경쟁하지 않고, 그리고  동기가 아무리 안 좋았어도  결과가 좋아졌다면 그 어떤 의도가 있었더라도 그 일로 인해 분을 품지 않는 사람이다.

나 그 당시엔 배속에서 자라는 애가 있었던 남편으로서 가정에 책임이 있었고 난 가장으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해서 마지막 갈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질문을 했다. 이때가 취직은 안되고, 퀼리가 떨어져서 학교에선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고 있을 때였다.  나는 유학생 때 항상 배고팠기에  미국 음식은 맞지도 않았고  한국음식점가를 가면  아직 입에 들어오지 않았더래도 한국 음식점만 지나가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한국에 거기 가장 뉴욕에 커다란 레스토랑을 도전했다. 그때 그래서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뉴저지 주에서 뉴욕 주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가고 사람들이 모이는 뉴욕에 갔더니 뉴욕한인회에 한인들이 많이  모이 곳을 알게 되었다.   그땐 가지고 다니던 핸드폰도 없어고 집에도  전화기가 없었다.  1990년 초엔  아무것도  없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이 벽돌같이 생긴 핸드폰도 있었고 집엔 전화기도 설치하는 시간조차  없고 간신히 쪽방 하나 빌려가지고 거기에 거주하면서 일을 다니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전화가 있던 뉴욕 한인회로 전화가  왔다.  그들이  나를 찾는 전화를 학교로 연락했다가 학교에선 이미 떠났다 하면서 한인 학생회장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했다. 한인 학생회장은 전활 받고 다시 뉴욕에 있는 한인회의 전화번호를 전해 주웠고 그 전화번호로 다시 전화해서 한국말도 아니고 영어로 나를  찾는다는 전화가 뉴욕 한인회로 왔다.  그게 뭐냐면 바로 취직자리 콜이었다.  그래서 내가 미국에서 그때 100여 명이 한 학기에 졸업을 하고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그중에 취직한 사람이 딱 내가 된 것이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거였다. 인터뷰는 오래전에 했지만 소식이 어서 이미 잊고 있었다. 그것도 나를 고용하겠다는 전화를 학교로, 한인 학생회장으로, 그리고 다시 내가 있던 뉴욕한인회로까지  전화 메시지를 남겨준 그  집요한 사람,  그 사람한테는 지금까지 나는 고마워한다. 나의 천사였다. 나는 뉴욕 레스토랑에 웨이터로 영원히 자리 잡 뻔했었다.  이게 형편이 앞으로 확 피게 할 한 통의 전화였다.  인생은 이렇게 종잇장 한 장 차이로 달라졌다.


지면 제한 때문에 원문의"새 직장 인터뷰"는 기재되지 않음



맥스웰 몰츠의 상상팁 5 ;  몰츠의  인터뷰

인터넷 정보 수집 후  Chat GPT4.0에 회사 정보를 입력해서 10개의 예상 질문서를 만든다.  그중2개를 집중해서 자료를 더 수집한다.  그다음 몰츠법으로 차별화한다;  과거 가장 기분 좋았던 때를 기억에서 찾아내고 그 기억에서 느낌 즉 감정만 추출한다. 그 추출된 느낌을 인터뷰에 합격통지받는 자신의 이미지 위에 추가로 로오딩한다.  그리고 인터뷰 전까지 자주 상상하고 강한 느낌이 올 때까지 반복한다.  상상이 현실로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참고로 비대면 인터뷰 중에 Chat GPT4.0의  연동은 윤리적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음을 알립니다.

 "이 핵심은 [Maxwell Maltz]의 [Psycho Cybernetics]에서 재구성 및 추가하여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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