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은 뉴저지 프린스톤대학가다. 이곳에서 겨울엔 스키장을, 여름엔 해변을 한 시간에 갈 수 있으니 편하다. 또 한 시간 안에 전철로 뉴욕 맨해튼 33 가도 갈 수 있다. 근데 내가 가장 자주 가는 곳이 해변이다. 그냥 가서 파도 소릴 듣는 게 좋다. 해변에서 설교하던 예수님도, 불도를 전한 부처님도, 신의 메시지를 전하던 모하멧트도 없지만 그 백그라운드가 만드는 파도소릴 듣다가 보면 그 소리 속에 그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 항상 그 소리 들고 있으면 맘도 안정되는 게 좋은 이야기들이 서서히 귀로 밀려오는 걸 느낀다. 그래 나는 자주 롱브랜치, 벨마 - 뉴저지에서 아름다운 비치들 -를 찾아간다.
거기서 내 친구, 밥( Bob)은 연을 타면서 서핑보드를 탄다 그걸 뭐라 하던데, 아~ 카이아트 보오딩( KiteBoading)라 하는 것 같다. 하여튼 파도가 심한 날만 골라서 연을 가지고 나온다. 그 친군 정유회사, 엑손에서 일하다가 은퇴했는데 지금 67세인데 일 없는 백수다. 해풍이 온다는 뉴스가 나오면 남들은 모두 집안에 들어 숨어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는 바닷바람을 찾아서, TV 보다가도 놓칠세라 해변을 향해 질주한다. 참 멋있는 스포츠다. 멋있는 스포츠를 하니까 그가 멋있어 보인다. 그가 하도 와보라고 졸라서 몇 번인가 카이트보오딩 동아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동아리에 가입하길 원했다. 좀 별난 걸 알게 되었는데 하나같이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제일 많은 사람은 82세였다. 아마 그 사람은 직접 즐기진 않아도 젊은 청년들이 지도하고 있었다. 미국엔 이렇게 재능기부가 많았다. 나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이걸 배워서 재능기불 하고 싶단 생각이 이 회장 노인네를 보니 들었다. 이렇게 그들은 바다를 그리워하고, 바다를 떠나지도 않고 그 주변의 집을 사서 평생 바닷가 근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내 주변에 있었다. 바다는 그들에게 안식처인지? 주식처? 인지 아님 어떤 모양이었든지 간에 바다라는 넓은 수평선은 닿을 수없었지만 늘 그들 곁에 항상 있었다.
하룬 큰아이가 하두 말이 없어, 어떻게 하면 애랑 말을 좀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바다를 생각하다가 보니 낚시생각이 났다. 난 낚시에 예전부터 걸리는 게 있어서 누구랑도 낚시이야길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낚시 애길하니, 가만히 있는 이 아이 입에서 대답이 나오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서 특별 이벤트로 낚시 가기로 결정했다. 우리 아침 일찍 크러커베렐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선착장, 벨마로 달려 내려갔다. 아마 낚싯대는 한 10년 전에부터 차고에 한구석에 꾸겨 넣어던 거였다. 평상시에 파도 소릴 듣는 걸 좋아해서 해변을 찾아봤지만 낚신 별로였고, 여기에서 애랑 말이나 좀 편하게 하고 맛있는 걸 사주고 싶어서 내리 달려 내려갔다. 도착한 거기엔 우리말고도 서너 사람들이 여기저기 띄엄띄엄 그날 아침 일찍부터 모래 해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앉아있었다. 거기선 낚싯줄을 드리우고 책을 보거나 아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 해변에선 술은 금지다. 해변에서 술병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면 경찰이 아주 센 벌금 티켓을 먹인다. 낚시면 증명서( License)를 사야 하는데 여긴 바닷물 낚시여서 증명서가 필요 없었다. 공짜다.
이제껏 미국생활이라 것이 직장생활에, 애들 태어난 후엔 산모 산후조리부터 시작해서 애들 커지면 좀 해방되나 싶었는데 애들 이런저런 학교활동에 다 따라다니고 특히 애들 생일파티엔 동네 애들 모두 초대해서 파티 엔터테인너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낚시는 둘째치고 그리하던 골프도 손에서 놓은 지 오래다. 낚시한 기억이라곤 어렸을 적에 인천 앞바다에서 낚시해 본 것 빼곤 별 기억이 없었다. 그때 정신 나간 망둥이 딱 한 마리 잡았던 기억은 난다. 낚시라면 나에겐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어서 낚시를 고의로 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난 광주사테에서 악명 높다던 20사단 보병 출신이다. 훈련을 멀마나 빡쌔게 시키는 지? 모른다. 100킬로에 30킬로 군장으로 하룻밤을 꼬박 새워서 군막사롤 들어오던 앞에서 한가로이 낚싯줄 던지고 있는 강태공을 생사를 가르며 들어온던 군인이었던 내 눈에 좋게 보여질 리가 없었다. 그 당시엔 우리 연대에서 불사조를 만들려는 목적인지 말도 안 되는 강훈련을 했다. 훈련 중에 분대 전체가 질식사로 죽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 같은 장소에서 한 집단은 죽어가는데 한 집단은 담배 연기 짤짤 피워가면서 한가롭게 물고기가 잡고 있던 그들을 난 좋게 볼리가 만무했다. 그것도 밤새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군부대로 들어가는 강 모퉁이가 우리 군부대 들어가는 바로 입구였다. 한가롭게 앉아서 군인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담배 연기나 뿜여대는 그들의 모습은 한 사회 안에 불공평한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나에게 한 결심을 하게 만든다. 그 일로 불평등한 집단의 아픔을 간과하지 않을 것과 다신 낚실 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그러던 내가 지금 세월이 한참 지나고 그런 기억도 가물가물해지고, 그리 힘차게 내렸던 결심도 흐물흐물 해 지고 있을 쯤에 아들 녀석을 위해서 바늘귀에 작은 생선을 끼우고 있었다. 그날 아침 바람은 아주 셌다. 해변 쪽을 향해서 불러오는 바람이 눈을 못 들 정도이고 그 바람에 맞혀서 따라 들어오는 파도도 엄청 셌다. 하두 세게 쳐들어 오니까 낚싯봉을 불어오는 바람에 반대 방향으로 던져진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던졌다. 그랬더니 던지는 족족 파도에 밀려 도로 밀려 돌아왔다. 결국 파도가 시작하는 점밖으로 못 던지는 거다. 검도를 했으니, 머리 치기만 수백만 번 연습한 사람이었다. 아마 발로 차라면 못하겠지만 머리 위로 던지라며 한번 해볼 만한 거였다. 그래서 이젠 낚시라고 생각지 않고 맘을 가다듬고 머리치기라 생각하고 힘껏 던졌는데 아이고~ 공교롭게 내가 내 발에 꼬여 앞으로 모래사장 위에서 꼬구라 넘어졌다. 나는 완전히 패대기쳐 저서 한 바퀴를 크게 원을 그린 후엔 나동그라져서 대자로 주욱~ 푹신푹신한 모래사장 위에 눕게 되었다. 어쩌다가 이런 고난도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짙은 회색 구름, 그리고 바람과 코 끝엔 세차게 스쳐가는 부서진 파도뿐이었다. 일단 보는 사람도 있고해서 툭툭털고 일어났다. 그게 다행인 건지?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파도가 시작하던 점, 한참 뒤로 낚싯밥이 떨어졌다. 소가 뒷걸음 하다 쥘 밟으려고 한 것일까? 의자에 앉으려고 돌아서려는데, 아니~ 이럴 수가……., 어느 정신 나간 물고기가 내 낚싯밥을 그 잠깐사이에 물어 버린 거다.
“아~ 감동……이였다. “
내가 황해안 앞바다에서 손가락만 한 망두일 봤었지만 내가 대서양 앞바다에서 물고길 잡다니~. 아~ 이 흥분과 긴장 속에 한 반시간을 싸웠나? 보다. 평상시 물고기 확 잡아당기면 줄이 끊어진 다는 걸 "죠스"영화에서 본 게 있었다. 간신히 그놈을 좀 풀어줘웠다 다시 댕겼다. 이걸 반복하다 결국 반시간을 싸우다가 물 밖으로 끌어냈는데 여기 물고기는 100파운드에, 1미터가 훨씬 넘는 블루피시를 잡아끌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혼자 물밖으로 끌어내지 못해서 옆에서 같이 낚시하던 두 세병이 병합해서 간신히 물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여기 물고기는 일단 무진 컸다. 인천 앞바다 망둥이 100 마릴 한꺼번에 낚은 량이었다. 물고기 크기에 따라서 집에 가져갈 수 있었는데 이 정도 크기를 집에 가지고 가도 벌금형이 아니었다. 여기서 한 가지 배운 게 있었다. 결국엔 해변에 일찍 왔던 사람들 보다 조금 더 던진 거였다. 그게 결국 낚싯밥을 파도 밖으로 던질 수 있었고, 그래서 완전 초자가 그 물고길 월척할 수 있었다.
그래 난 그날 돌아오면서 이미 존경에 눈으로 바라보던 큰 아이한테 이때 뭘 좀 배워 줄려는 목적으로 목소리 낮추어서 이렇게 가르쳤다.
"애야! 남을 보다 너무 월등하지 마라 그러면 미친놈 취급받는다. 왜냐하면 너무 월등하면 모자란 사람은 무시하고 똑똑한 사람은 경계한다. 근데 조금만 월등해라. 반발짝만 잘하자. 그러면 가까이 와서 친구 하려 한다. “그러니 쪼끔만 낫게 살아라"
마치 월척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조금"과 "많이"를 사용해서 아이에게 이렇게라도 조언을 주고 싶었다.
"그러니, 아침샤워시간을 조금만 조절해자"
<침묵>
큰아이는 샤워가 문제이었는데 적어도 샤워시간은 조금 조정을 해야 되지 않나? 해서 한 말이었다. 어쨌거나 큰아인가 확실히 못 알아들은 게 분명한 게, 그 이후엔도 여전히 아침 샤워는 한 시간이 넘었다. 이 애는 청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여서 아침마다 5종의 샴푸로 온몸의 부분을 나눠서 벌겋게 살을 특별 트리스먼트를 하신다. 그래도 이 아이겐 나는 아빠랑 잡았던 그 물고기가 그 아이의 가장 인상을 남기는 큰 기쁨이었으면 했다. 그렇다면 어느 날 이 아이가 몰츠를 알아갈 때, 이때의 감흥이 몰츠의 기재가 될 것임이 틀림없었으니 나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살다가 창업이든지? 새 직장이든지? 세상에 태어나서 생전해본적이 없는 도전을 할 땐 이런 느낌을 성취될 이미지에 로오딩해서 힘을 얻을 테니 말이다. 그걸로 됐다, 난.
언덕 위에 하얀 집
큰아이의 길거리 사건이 생긴 이후에 그렇게 오매불망 찾던 언덕 위에 하얀 집, 바로 언덕 위에 있는 켄터키집이다. 오로지 머릿속으로 그렸던 소원했던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집이 나의 기억엔 제일 아름다운 집인 셈이다. 아이들이 나가 놀아도 전번처럼 차 사고 날 걱정이 안 되었다. 언덕 위에 집이어서 이 마을 입구부터 서행을 하며 지나가는 운전자들도 아이들이 밖에 나와 놀면 손부터 흔들어 준다. 아이들은 따라서 손을 흔들어 웃으면서 환대하면, 그들은 아주 천천히 차를 몬다. 켄터키 부호들만 살기 때문에 이 동네 입구부터 차를 거칠게 운전하던 자들조차 자세를 고쳐서 입구에 진입해 들어오곤 한다. 특별 계층에 있어 보지 못했던 나에게 이곳이 아이들 키우기엔 천국 같은 곳이다. 당연히 이 마을 사람들은 서로 보면, 눈인사는 하는 것 다반사이고, 굿모닝~ 하이~는 아주 달고 산다. 그리고 동네 입구가 워낙 있어 보여서 허접한 자들은 아예 발을 들여 놀 생각조차 못 하고 그 흔한 경찰차가 순찰이 없어도 이 동네는 늘 평화롭다. 이 동네를 들어오려면 저기 아래 언덕에 대나무 숲을 지나서 한참 동안 액셀을 밟아야 50미터 정도 언덕 위로 다 닿을 수 있다. 올라온 다음에 커브를 꺾어야 동네의 진입구가 보인다. 당연히 저속 기아로 변환해야 회전이 가능하다.
들어서면 양쪽에 일정 간격으로 커다란 개나무가 쭉 들어서 있어서 이른 봄이면 하얀 눈송이가 하늘하늘 입구부터 떨어진다. 하얀 꽃의 축제 뒤엔 하나같이 아름다운 집들이 줄을 지어 서로 뽐내듯이 서있기에 이 집 저 집을 기욱이다 보면 당연히 서행이 된다. 고지의 정상의 얼마나 광활한가를 마치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아주 평평한 고지의 평야가 눈앞에 나타난다. 거기부터 집들이 시작한다. 첫 번째 집이 차알스할아버지 집이고 왼쪽 첫 번째 집이 도요타 사장집이며 우리는 오른편 둘째 집이다.
켄터키의 푸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마치 그림 속에서 나올 듯한 귀한 자태를 자랑한다. 집은 고풍스러운 동백나무로 지어졌으며, 푸른색 철지붕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집 앞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끝에는 오래된 참나무가 우뚝 서 있다. 차를 몰고 집 앞에 진입하면 커다란 통나무 된 더불도어 차고 문이 있고 그 앞엔 짙은 타르색깔의 아스팔트가 넓게 깔려 있다. 짙은 아스팔트 위엔 내 차, 캐딜락과 아내 차, 소형 소나타가 항상 푸른색과 하얀색이 사이좋게 파이킹해 있다. 거기서 우측으로 돌면 가로등이 일정 간격으로 진열해 있고, 잔디 위에 하얀 자갈이 장식으로 깔려있으며 길을 따라서 줄 서있던 가로등이 끊어지고 대문으로 연결되는 곳에 키가 우뚝한 기둥 하나가 서 있디. 그 기둥의 맨위자락에 한표시판이 있다. 그 표시판에 "벧엘"이고 쓰여 있다. 우리는 별장 같은 분위기를 준다 하여 그 싸인판을 애지중지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자갈이 깔린 작은 길 사이사이로, 양옆에는 다양한 꽃들이 피어 있다. 봄이 되면 튤립과 이른 여름엔 장미가 만개하여 향긋한 향기를 풍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무로 만든 아치형 문이 나타나고, 그 문을 지나면 집의 현관이 보인다.
나는 벧엘 산장의 주인이다. 문은 중세시대난 볼 수 있는 대형 통문이다. 아주 두꺼웠고 무겁다. 손잡이를 잡고 열기 전에 위를 보면 이 집은 마치 성당문을 들어가는 것처럼 지붕이 무척 높다. 하늘 전면을 가릴 정도로 높고 사이사이 지붕과 처마 밑엔 굵고 긴다란 섯가래가 처마 밑으로 여러 가닥 나와 있다.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지붕만 유독 구리합금으로 되어있어서 구리판에서 나오는 푸른빛때문에 자연스레 오래된 교회당을 연상케 하는데 장렬한 여름 햇살에 푸른색은 다른 집보다 더 고풍스럽고 중세 시대 성주의 집처럼 보여서 누가 이 동네에 제일 성공한 사람의 집인지?를 자연스런 풍광만으로도 알 수 있게 한다. 육중한 대문을 힘을 주면서 몸으로 밀면서 들어간다. 문이 열리면서 객실 안에 가득 있던 향나무 향이 코를 스친다.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잣나무 바닥과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에는 넓은 거실이 있었고, 오른쪽 중앙에 벽난로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벽난로 위에는 가족사진과 몇몇 개 촛대들이 있고, 벽난로 안에 장작엔 늘 작은 불꽃이 있어 집 전체를 따스럽게 한다. 그 옆에는 책장이 있다. 책장에는 다양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고, 그중에는 오래된 고전도 소설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희랍신화 책도 있다.
그리고 그 거실을 지나면 또 하나의 거다란 테이블이 있는 방이 나타난다. 그방은 유리창이 사방으로 있고 그 유리창문은 나무살이 촙촙이 장식되어 유리창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창호지문처럼 보이게 만들져 있다. 나도 이런 창문을 미국에 살면서 처음 보았다. 이 유리창문은 옛날 젊었을 때 오사카 하숙집에 머물렀었는데 그 하숙집의 방문과 흡사하다. 그 방에만 들어 서면 그때 생각이 나게 한다. 그 방에서 목을 길게 빼고 밖을 보면 마당에 깔린 푸르른 잔디위에 한 개의 키 큰 잣나무가 보인다. 그럴땐 꼭 그때 하숙집 앞마당이 연상케 한다. 옛날이 생각이 나게 하는 그 방에서 차를 마시기에 적격이다. 물론 도요타 사장도 옆집 찰알스 할아버지도 모셔다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면 담소하기 아주 좋은 곳인데 이곳은 아침 햇살이 제일 먼저 이방부터 비치기 때문에 나에게 더 인상적이다. 저기 언덕 아래 호숫가에 아침 안개 낮게 깔리면 이 집에 첫 햇빛은 저 창호지문살을 여기저기로 비집고 들어와서는 칠흑 같은 어둠에 축축해진 방 안의 공기 색깔을 하얗게 바꿔준다. 회복이 시작되는 곳이다. 집안이 따스해 질 때쯤엔 커피 머신에선 커피 내리는 힘찬 소릴나고, 한약 달이듯이 꽉 누른 커피를 머그에 받아 마실쯤엔 진한 아메리카노 커피 맛과 향도 좋지만, 손바닥에 전해오는 온기는 이 방이 주는 행복감을 더 해준다. 좋아하던 음악까지 잔잔히 흐르면 이태리 친퀘 테레(Cinque Terre) 호텔방에서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는 착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방을 유난히 좋아한다.
왼쪽으로는 주방이 있고, 주방 창문을 통해서는 뒤뜰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인다. 주방에는 커다란 식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항상 신선한 꽃이 꽂혀 있다. 주방 뒤쪽 문을 열면, 작은 테라스로 나갈 수 있고, 테라스에서는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통나무로 만들어져 있고, 오르면서 집 전체를 다 볼 수 있고 천장은 이층이 훨씬 넘어서까지 굵은 섣가래가 좌에서 우로 아주 길게 지나간다. 계단을 오르면 침실과 서재가 있다. 침실은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창문을 통해서는 멀리 보이는 저 멀리 있는 아팔라치안 산맥의 끝자락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서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으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방을 밝게 비춘다. 2층에서 지하실까지 내려가는 계단은 1965년 쥬리 앤드류스가 주연했던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에 일곱 명의 아이가 부르던 노래, 도레미( Do-Re-Mi)이란 도, 레, 미, 음정마다 부르던 그런 생각이 불쑥 나게끔하는 그곳은 넓은 집이 펼쳐 놓은 것처럼 모든 것이 보이는 유일한 곳이며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집이 엄청 넓고 높았음에도 어디에 숨어 있어도 숨겨진 옷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애들을 11명 정도 나서 축구팀을 만들어 볼까 한 적도 있었는데 도레미 7 음정조차 못 채우는 똘락 2명만 낳았다. 똘랑 둘도 키우면 별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간신히 부모행세를 하고 있는 나에게 이 아이들은 너무 과하게 행복을 줬다.
지하실은 벽이 모두 베이색으로 도배되어 있고 중앙 가운데는 넓은 책상을 두 개 겹쳐서 내가 주로 작업을 하는 곳이다. 책상 위에 그리다 내버려 둔 그림 몇 점 있고 그리고 저 구석은 일용 침대까지 구색을 마쳐서 놓여있다. 일하다 피곤하면 잠시 누워서 구상하기에 아주 제격인 장소이다. 이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추억과 사랑이 가득한 공간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들, 이웃 친구들과의 웃음소리들, 그리고 혼자만의 고요한 순간들이 이 집에 특별하게 칠해져 있다. 오늘과 내일의 차이는 잘 모를 정도인데 책을 싸들고 학교롤 들어 갔을때와 오늘의 차이는 확연하다. 그렇다면오늘의 나는 분명 성공한 사람이다.나는 맛을 느끼고 싶고 그걸 만지고 싶는데 나는 느끼지도 만질 수도 없다. 나는 그런 센스를 잃고 살아오는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이렇게 직접 느끼지 못하는 것은 간접으로 알 수 밖에 없다. 해서 내 주위를 다시 둘러 본다.
이 시간쯤에 일어나서 다니는 사람은 이 집에서 나 혼자다. 아내는 안방에서, 아이들은 이층 방에서 다들 단꿈을 꾸도 있고 새로 들어온 강아지, 대니조차 자기 집에서 자고 있다. 나의 책임감 때문인지 나는 이런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할 일을 다하고 난 다음은 안정감, 그리고 나의 책임을 다했다는 만족스러움이 행복을 주곤 한다. 혹여 내가 군대 천사가 아니었었나? 할 정도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잘 지켜냈다는 책임감이 나의 보람으로 바뀌고, 또 그 보람이란 것 때문에 내가 행복한 사람인 걸 알게 한다.
그런데 진정한 축복은 마지막으로 나온 막내딸이다. 나는 딸이 나오자마자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딸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사랑이란 걸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냥 애정 소설에서 나오는 정도로 사랑을 개념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얘가 나오고서부턴 이 애를 위해서 목숨을 버려도 좋았다. 이 아일 통해서 사랑은 희생과 바로 직결되는걸 알게 되었다. 한 밤에 잠을 안 자고 징징거려도, 잠시 눈 붙였던 잠을 또 못 자게 칭얼대도 이뻐 보였다. 내가 이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집을 가질 정도로 미국에서 성공했다 했더니 이제 제일 사랑스러운 딸까지 생긴 거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였다. 그러니 밤에 울어도, 칭얼대도 모두 이쁘니 세상이 아름다웠다.
하이웨이 달리다 응아를 했다. 고속도로 중간쯤에서 도로변에 세운 다음 기저길 갈아주고 있었는데 고속도로 순찰차가 그 사이를 못 참고 따라붙었다. 한 경찰관이 뚜벅뚜벅 걸어오니 차에 가까이 와 붙어선 차 창문을 열라고 손짓으로 날리었다.
“운전면허증과 보험 좀 ~”
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바쁜데 고속도로에서 그런 소리 들리기가 만무였다. 이젠 그 사이을 못 참고 창문 문까지 열어달라고 톡톡 처댄다. 안달을 하는 경찰을 보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아이고 으악”
경찰은 괴음을 질러댔다. 열린 차창 사이로 응아 냄새가 이 경찰 친구의 코를 그냥 처 버린 모양이다. 경찰은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서 코를 쥐어 잡았다.
“ 그냥 가시오”
나는 아직 한 마디도 안했다. 그런데 경찰은 혼자 말을 중얼거리면서 코를 잡고 돌아서 가버렸다. 가버린 경찰을 보면서 나와 아낸 킥킥대면서 웃기만 했다. 난 그냥 통쾌하면서 행복했다. 그 나무로 된 언덕 위에 집, 가장 아름다운 집, 아내 그리고 큰아이가 3살, 지금 바로 나온 딸이 1살이 내가 지켜야 할 보물들이었다.
나폴레옹 힐(Napoleon Hill)인 쓴” 생각하고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 ( Think and Grow Rich)란 책의 한 예문에 로버트 르투르노는 공사 입찰을 받는 곳애서 폐석이 나오면서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잃었지만 그는 다시 폐석으로 성공해서 1센트까지 보상받았다는 대목을 나의 뇌리에 색인 적이 있었다. 그가 가진 것을 다 잃어가도 그렇게 집요하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패배와 동행하는 동전 반대편엔 반듯이 이득의 씨앗이 있다고 그는 믿었기 때문이라고 그 구절이 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렇다. 나에게 주어졌던 고난이 남들과 달랐다. 그 다른 만큼 실패의 아픔이 있었지만 그 실패의 동전 반대에 반드시 이득이 있음을 나도 믿고 있었다.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에너지 총량의 법칙이다. 인생의 마이너스가 있는 만큼 반드시 플러스가 있어야 했고, 그걸 찾아야겠다고 기다려 온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난 그 뒤엔 숨어있는 모든 이득을 보기 전 절대로 판을 뒤집을 순 없었다. 나도 꼭 1센까지 보상받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더 열심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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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안전한 곳을 찾는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서 얇은 숨을 쉬는 것이 인지될 정도로 몸을 이완시킨다. 숨소리가 귀에 더 가까이 들리면 조금 시간을 더 들여서 몸과 마음을 조금 더 이완시킨다. 충분히 편안해지고 몸과 마음이 이완되었다고 생각이 들면 그 다음엔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편해지길 조금 더 기다린다. 편해지면 상상의 스튜디오속에서 상상으로 “복제한 나”를 만든다. 그렇게 만든 “복제나”에게 지금 나의 불안정한 감정이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충동적인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금 복제나가 어떤 정보나 결정을 내릴 단서를 주어도 복제나에게 예전과 같이 안정된 상태가 될 것임 알린다. 그다음엔 “복제나” 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하나씩 붙여가면 묻고 또 사전에 편향된 판단 있었다면 “복제나”가 조금 더 객관화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진는다. 더 이상 충동적인 상황이나 격한던 감정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고 옳은 해결책을 찾도록 '복제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 후엔 도덕적 또는 사회적으로 옳고 그름에 휘둘리지 않는지 “복제나”가 들려주는 작은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우린다.
"이 아이디어는 [Maxwell Maltz]의 [Psycho Cybernetics]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