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몰츠식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산후조리와 홍당무 김치
1943년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스로루 ( Abraham Maslow)의 인간의 욕구는 5단계의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가장 기초적인 첫째 욕구는 생리적 욕구로 다름 아닌 인간은 어째든지 먹고살아야 한단 얘기다. 이 한치에 오차가 없어야 할 이민 생활에서 그 성숙한 자아 이미지를 유지하려면 우선 생리적 욕구를 가볍게 보아선 안 된다. 여기선 쓰러지면 일으켜줄 형도 누나도 없었다. 그러니 생리적 안전지대는 필수였다. 그래서 나는 푸드샤핑만큼 충성스럽게 했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내 기호에도 맞는 듯해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푸드샤핑점에 가득한 과일을 보면 신선한 과일에어 나오는 냄새가 언짢았던 기분도 힐링시켜주곤 했다. 그래서 난 항상 기분 나쁘면 먹는 샤핑을 했으니까 먹은 것만큼은 풍부하게 냉장고에 쌓아 놓았었다. 이것이 가족의 잔병치례를 없애는 예방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켄터키에 정착한 우리는 동부나 서부에선 쉽게 찾을 수 있는 동양장이 없었다. 해서 주로 먹거릴 크로거 ( Kroger) 푸드체인점에서 사 왔다. 난 미국 생활하면서도 김치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근데 나랑 같이 사는 아내는 달랐다.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었다. 이래서 김치를 집에서 담을 방법을 착안해 냈다. 둘째애가 출산 후에 나 혼자 하는 산후조리 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나는 항상 바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이미 첫 번 애 경험이 그래도 좀 있었다. 빨래는 기계에 잡아 돌리면 되니까 문제는 없었다. 아내가 보는 앞에선 색깔별로 하고 분리세탁하고, 안 볼 땐 한꺼번에 잡이 돌렸다. 문젠 미역국이며, 김치를 이거 다 해야 할 판인데 그놈의 레시피를 몰랐다. 그렇다고 뉴욕에 있는 장모님을 불러 모셔와야 하는데 그렇게 호락호락 올실 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에 시집가 사는 누이를 불러 댈 수도 없고 그래서 여러 군데 파출부를 알아봐도 내가 있던 시골 동네는 어떻게 됐는지 파출부란 차체가 없었다. 이렇게 차일피일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작은 애는 덜커덩 튀어나온 이후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는 거다. 계집애라 아주 까다롭기가 보통이상으로 넘었다. 다행스러운 건 첫째애는 사내놈이라 그런지, 새로 나온 동생과 달랐다. 조금 컸다고, 말은 못 해도 그냥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젖병만 물려주면 잘 컸다. 참 이 녀석은 착해서 나에게 무척이나 감사한 가족일원 중에 한 명이었다. 나에게 이런 애라도 있는 것이 고조 감사할 뿐이었다.
그래서 드디어 김치 프로젝트에 착수를 했다. 그 당신 먹방도 백종원의 유튜브도 없었던 시절에 어디서 조금이라도 있었던 기억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야 했기에 남아 있던 옛 기억이 중요했다. 재료검색 후 재료를 하나하나 구입했다. 일단 김치에 넣을 고춧가루( Pepper Power)는 서양장에서도 구할 수가 있었다. 문젠 여긴 한국배추가 없었다. 그래서 양배추로 대치했다.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서 팍~ 팍~ 죽인후에 이 양념하고 섞어야 했다. 근데 양배추를 놓을 그릇이 없는 거다. 찬장을 아무리 뒤져도 이만한 분량을 담을 그릇이 없었다. 그런데 생글생글 웃고 있는 녀석이 욕조하는 플라스틱 목욕탕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욕조에서 빼내어서 깨끗이 싹싹 닦은 다음에 양배추를 넣으니 안성맞춤이었다. 그다음은 양념을 만들었다. 고춧가루에 설탕에, 다진 마늘에, 젓갈이 없어서 생굴을 넣었다. 그다음엔 휘저었는데, 어~ 맹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게 영~ 김치가 될 것 같지 않았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었어도, 예감은 내손 끝의 감각에 팍~ 꽂히는 거다. 난 이런 경험을 자주 했었다. 모르는데 그냥 몸속에서 오는 감인데 “이것이다”라는 게 있었다. 이것이 이것저것을 시도힐 때 믿는 구석을 만들어 주곤 했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김치 쪼가리에 달라붙어 있게 할 수 있을까? 뭐 달라붙어있어야 저 푸성기가 숨이 죽고, 부드러워질 텐데 말이다. 막연했었다. 그래서 찬장을 몽땅 다시 뒤지니 하얀 녹말가루가 나오는 거다. 옳다! 이거다. 녹말을 잘 쑤어서 거기에 고추장을 조금 섞은 다음에 양념과 섞었던니 조금 걸쭉한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걸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김장 때 하는 걸 본 적도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뭐가? 빠진 기분이었다. 옛날에 엄마가 하시던 김장엔 무를 길게 채 썰어서 양념에 같이 버무리던데. 아~ 여기 한국 무가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대체품을 찾아 나섰는데, 머릿속에 형광등처럼 지난 간 게 홍당무였다. 홍당무를 다시 사다가 얇게 썰은 후에 양념하고 같이 버무려 보았다. 좀 짜긴 했지만 얼얼한 혀는 이 맛인지? 저 맛인지? 대충 그게 그런 것 같았다. 다음엔 수거용 플라스틱 백 속에 양배추과 양념을 함께 버무리면서 차곡차곡 쌓았다. 그다음은 똘똘 싸아서 방 한구석에 익을 때까지 두웠더니 한 3일 지나는데 무척 궁금한 거다. 저게 김치가 됐나? 아님 무슨 괴물이 됐나? 만들자마자 맛을 보니, 그런대로 너무 풀을 집어넣었는지? 걸쭉한 고추장맛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일주일 지나자 이게 괜찮은 김치가 되어 있었다.
홍당무로 김치를 담가 먹으며, 우리는 켄터키 그 시골 구석에서 이렇게 생존했었다. 그때 배운 게 두 개 있다. 하나는 결혼하곤 음식솜씨가 서투른 아내를 볼 때마다 결혼 전에 살림살이 배웠냐? 고 따져 묻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다음부터 일절 이런 말을 안 했다. 실제로 미국생활에선 결혼하고 웬만한 음식 만드는 법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가 필수로 배운 다음에 결혼했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애가 나오면 두말 말고 미국생활엔 만사를 남편이 산후조리 해야 했다. 서양여자들은 3일 만에 찻물로 샤워하고 자기 일로 하는 반면에 우리 한국 여자들은 한 달이 뭐여~ 한 세 달은 뜨스운 온돌방에 물 한방을 안 대게 하고 산후 조리 해줘야 제대로 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남편들은 이게 고생이라도 이게 싸다. 이때 잘못하면 평생 병원을 다녀야 했는데 서양 의사들은 이런 병을 제대로 진단하는 서양의사를 본 적이 없다. 동양여자의 산후조리를 그래도 우리 어머님에게서 들었던 나는 산후 조릴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나는 어렸을 때 김장하는 엄마 주변에서 얼쩡거리면서 어깨너머로 습득하게 있어서 김치작업도 잘 해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예상치 못했던 산후조리에서 정말 궁하면 통한다고 완벽하지 못했지만 그나마 남편으로 제역활을 발휘할 수 있었다. 둘째론 조선배추과 조선무가 그렇게 김치에 잘 어울리는지 처음 알았다. 나중엔 대도시에 출장 갈 때마다 굴젓이여, 멸치젓까지 사다 왔었는데, 김치가 양배추로 만든 김친 그렇게 뻣뻣해서 먹기가 참 불편했다. 김치엔 한국배추와 한국 무가 제격인 건 처럼 무얼 하든지 찰떡처럼 맞는 궁합이 있었다. 셋째론 한국인의 음식문화는 타고난 혈통처럼 어딜 가든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았다. 특히 그리도 햄버거를 좋아하던 나도 여렀을때 먹던 김치찌개를 찾고 있다. 먹거리문화는 쉽게 바뀌는데 아니었다. 세 살 때 먹거리습관이 여덟 살까지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