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포기 밖에 안 남은 아쉬운 김장 김치
우리 오늘 저녁 뭘 먹을까? 하다가 김장 김치를 내서 쭉쭉 찢어 먹으면 어떨까? 말하는 동시에 딸도 결혼 전에 먹었던 것이 가끔 생각나서 그렇게 먹어보지만, 그 맛이 잘 안 난다고 하며 엄마하고 먹어야지 제대로 맛이 난다고 한다. 남편은 길쭉이 김치가 아니라 아직도 가지런히 잘라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 시어머니는 언제나 음식을 가지런히 예쁘게 담아내셨다. 남편은 예쁜 것보다 투박함이 더 구수하고 맛난 것인지 모를 것이다. 어릴 때 기억은 나이가 들면 더 그리운 법이다.
결혼하자마자 시댁에서 함께 살면서 어느 날 김치 한 포기를 내어 위만 싹둑 잘라 통째로 냈더니 시어머니, 시아버지, 남편, 시동생 2명 모두 모두 눈이 휘둥그레했다. 열 손을 묻혀가며 직접 김치를 쭉쭉 길게 찢어 놓고 “숟가락에 밥과 김치를 얹어서 이렇게 먹는 것이다”라고 얘기하며 시범까지 보였다. 갑자기 원시인이 된 기분! 먹기 좋게 길게 잘라 주었건만, 모두 긴 김치를 들었다 놨다 했다. 재미없다. 밥숟가락이 입에 터질 듯이 들어가는 것을 서로 마주 보며 먹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세월이 지나고 딸들이 중학생이 되니 내가 먹는 모습을 보며 숟가락을 들이대며 김치를 얹어달라고 했다. 얼마나 기쁘던지. 추억은 그리 이어져 우리 집 김치 역사가 되어 갔다. 그 쭉쭉이 김치 역사의 근원은 이러하다.
친정엄마는 해 년마다 김장을 몇백 포기씩 했다.
친사촌, 외사촌들이 들락날락하며 고등학교를 우리 집에서 여럿이 다녔고 취직하여 있는 사촌도 2명이 함께 있었다. 아버지 사업으로 인한 직원 오빠들도 있어 김장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해야 할 양에다 동네 사람들에게 보내줄 엄마의 인심까지 덤으로 넣으니 엄청난 양의 김장을 동네 분들과 함께 한다.
땅속 깊숙이 단지 속에 김치를 넣어 묻어둔다. 가끔 엄마 따라 김치 가지러 가면 살얼음이 끼어있는 것을 본다. 따뜻한 밥 위에 올려놓은 김치는 순식간에 살짝 녹아 서걱거리며 씹히는 살얼음과 시원한 김치맛의 조화는 세상 어떤 맛에 비길까?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지면 아버지와의 김치 추억도 그리워진다.
어릴 때 살던 곳 강원도식과 부모님의 고향인 경상도식 짬뽕 김장은 동네에서도 그 맛을 알아줬다. 툭툭 썰어놓은 무와 각종 생선을 넣어 버무려 삭힌 우리 집 김치는 지금도 입맛을 다시게 한다.
겨울밤은 왜 이리 긴지, 이것저것 하다 보면 배가 슬슬 고프다는 신호가 온다. 배고프다는 소리에 아버지는 바로 김치 항아리로 가신다. 아버지의 사랑법이다. 묻어둔 항아리에서 바로 꺼내온 배추 한 포기와 투박하게 썰어 놓은 무 몇 조각에 김칫국물까지 적당하게 큰 그릇에 배치하여 가지고 들어오신다.
배추 위만 잘라 아버지는 투박하게 생긴 열 손가락으로 길쭉하게 찢어 우리들의 밥숟가락에 얹어준다. 가끔 푹 삭힌 생선 한 토막도, 적당히 익어 시원한 무도 당신의 양손에 들고 있으면 딸 세 명은 각각 아기새 엄마가 주는 먹이를 먹는 듯 한입씩 번갈아 가며 깨물어 먹는다. 아버지가 주시는 김치 크기는 입에 들어가기 버겁다. 아버지가 흐뭇해하며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몇 번의 입놀림을 하며 구겨 넣어 입이 터질 듯 그렇게 먹는다. 입과 볼이 터져라. 들어간 것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입속에서 밥과 김치의 명 조합이 느껴진다. 결혼하고 김치를 길게 찢어 혼자 먹을 때 아리도록 그리운 마음과 함께 그때가 행복이었음을 알게 했다.
동네 사람들은 밥맛이 없으면 SO(우리 집) 집에 가면 저절로 입맛이 돌아온다고 했다. 우리들의 밥숟가락에 김치를 얹어 먹는 입 모양과 아버지의 모습에서 동네 사람들은 "먹는데 너희들은 복이 다 들어있다"라고 했다. 시골에서 5남매 모두 서울에서 직장 다닌다고 SO 집 애들은 어려서부터 먹는데 복이 있더니 성공했다고 했다. 시골 분들은 서울에 가면 다 성공한 줄 안다.
딸과 함께 김치를 쭉쭉 찢어 따뜻한 밥과 먹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올해 김장은 아는 지인이 해서 보내주셨다. 시원하고 심심하며 알싸한 맛까지 난다. 한 포기를 내고 나니 두 포기가 남았다. 이렇게 먹을 시간도 얼마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생긴다. 푹 삭인 김장김치는 요즘 담그는 김치 맛과 많이 다르다. 사람도 푹 삭고 곪 삭은 진국인 사람이 좋듯이 말이다.
오늘 저녁 따뜻한 흰쌀 밥에 김치를 쭉쭉 찢어 얹어 딸 숟가락과 내 숟가락에 번갈아 얹어 주며 가며 먹는 맛 조합은 최고다. 부모님의 그리움과 합하니 감칠맛이 더 난다. 딸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입 또 한입 하며 먹다 보니 거의 한 포기를 둘이서 먹었다. 늦은 밤까지 물로 몸 속 짠내를 씻어내고 있다. 어릴 적 추억의 맛은 나이가 들어가니 더 아리고 그 맛과 정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