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발언 소설]존댓말로 쓴 편지는 이루어진다 1화

처음으로 쓴 연애편지는 이루어진다, 누구나


제 1화- 처음으로 쓴 연애편지는 이루어졌다.

단지 독자가 의미를 찾지 않았을 뿐!



처음으로 쓴 연애편지는 너의 운명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모른다. 누군가를 향해서 쓴 글은 이루진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다.

성경이 편지라는 사실을, 일리아스가 편지라는 비밀을 모를 것이다. 글로 써서 전하는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중간에서 악마가 대신 낚아채지 않으면 어떻게든 편지대로 이루어진다.

처음으로 연애편지를 써서 부치고 싶었던 사람은 그 남자였다. 그 남자의 이름이 동네 동생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때 가슴이 설레였다. 그 남자의 얼굴도 모르지만 그 이름만으로, 그 남자가 서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가슴은 콩닥콩닥 콩타작을 하듯 어디론가 튀었다. 귀는 천리안 토끼처럼 쫑긋 안테나가 그들의 대화 방향으로 완전히 구부러졌다.

그 남자는 동생 친구의 사촌이고 이름은 노연기였다. 하지만 이런 관계망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내 마음은 이런 망을 단번에 통과하여 이미 그 노연기에게로 향했다. 노연기에게 편지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신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았다.

동생 친구의 집은 우리 큰밭 근처의 외진 집이다. 그 집은 대밭이 우거진 담장이 높은 기와집이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노연기라는 멋진 오빠에게 편지를 쓰는 상상은 아이가 한 인간으로 껑충 성장하는 경험이었다. 고열에 들떠서 미세한 세포가 모두 타서 죽고, 뜨거운 열기를 견딜 수 있는 세포만이 살아남는 느낌이었다.

13년간 살아온 번데기의 껍데기가 깨지는 아픔과 시원함이 느껴졌다.

노연기라는 남자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다는 상상으로 그동안의 나의 작은 거치대는 산산조각 났다. 다만 세상을 가둔 담벼락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세상을 가둔 첫 번째 담은 노연기 사촌 집의 우편함이었다. 그 우편함 속에는 노연기의 주소가 들어있을 테니까.

드디어 그 우편함을 자연스럽게 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큰 밭에서 고구마를 수확하던 날에 노연기의 주소를 터는 거사날로 정했다. 리어카를 끌고 큰밭으로 가다가 노연기 사촌 집의 높은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키가 작았던 나에게 대문에 붙은 우편함은 거대한 성이나 다름없었다. 그 담벼락 주변에는 온통 국화꽃이 누렇게 하얗게 성글거렸다. 인적이 드문 틈을 타서 리어카를 딛고 우편함을 향해 두 손을 냅다 뻗쳤다. 우편함에 가득한 우편물의 촉감이 느껴진 순간, 리어카의 바퀴가 움직였다. 리어카의 바퀴가 스스로 다른 세상을 향해 돌진했다.

리어카가 데려다준 세상은 마을 어귀의 풀밭이었다. 리어카가 데굴데굴 굴러 허허벌판으로 직진했었나 보다. 다행히 허허벌판에는 클로버 동산이었다. 폭신한 클러버 동산에서 눈을 떠보니, 마을 사람들로 빙 둘러싸여 있었다. 고구마가 옹글옹글 영글어 줄기와 분리되기에 딱 좋은 초겨울의 풀밭은 포근했다. 봄은 꽃과 새잎이 이별하기에 좋은 계절이고, 겨울은 고구마 뿌리와 줄기가 이별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리어카에는 주먹만한 자색 고구마가 가득했다. 내 주먹에는

맙소사, 노연기의 주소가 적힌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꼭 쥐어져 있었다.


노연기 오빠에게, 노연기 오빠 님께, 호칭에서 조금 망설여졌다. 호칭이 정해지자마자 편지는 급하고 빠르게 쓰였다.

노연기 오빠에게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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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연기 오빠, 저는 선창 마을에 사는 오산희입니다.

오빠의 이름을 들으며 바로 알았습니다. 오빠가 바로 나의 편지를 읽어줄 사람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답니다.

노연기 오빠,

우리 동네에 우리 학년의 남자아이가 전학을 왔어요.

그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휙 지나가면 왠지 나의 옷차림이 부끄러웠어요.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묘한 부끄러움이에요.

온몸의 신경이 탱탱하게 꿈틀거리는 신선하여 견디기 어려운 부끄러움이었답니다.

그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 나의 치맛자락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상상을 하면 온몸이 따뜻해졌어요. 그 따뜻한 기운은 나를 춤추게 했어요. 코스모스가 활짝 핀 길을 까치발들 들어 깽깽이 춤을 추고 싶었답니다. 바로 춤을 췄습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신작로의 긴 길이 아쉽게만 느껴지는 공간의 짜릿한 아쉬움의 착각을 경험했답니다.

농지 정리가 가지런한 농수로에는 엊그제 내린 장대 같은 가을비로 콸콸콸 경쾌하게 흘러갔습니다.

그때 마을에서 들려오던 긴 ‘솔’ 음으로 시작하는 ‘J에게’라는 노래의 주인공은 오빠와 나였답니다.

노연기 오빠를 찬양하는 가요였습니다.

노연기 오빠

우리는 J에게라는 찬양가요에 등장하는 주인공입니다.

오빠는 ‘J’의 긴 음표이고, 나는 작은 음표들입니다. J에게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출 때 펄렁거리는 플레어스커트가 있다면 차암 멋있을 것입니다.

비록 청바지를 입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춤을 추며 노연기 오빠를 향합니다.

그때 이 작은 음표의 샬라라 춤을 멈추게 하는 자전거가 지나갑니다. 그 남자도 J에게의 리듬을 타며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지나갔습니다.

그 전학생 남자의 이름은 득두입니다.

득두가 이렇게 J에게의 리듬을 타며 지나간 이유는 허영미라는 우리 동네의 미인에게 온통 정신이 팔렸기 때문입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허영미는 언니가 입던 플레어 교복 치마가 무척 잘 어울린답니다. 우리는 교복 자율화라서 자유롭게 아무 옷이나 입고 학교에 가면 됩니다.

하지만 허영미는 리본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 플레어스커트를 살짝 펄렁거리고 다녔어요. 득두는 그 모습에 반했는지, 허영미를 스쳐 지나갈 때면 그의 핸들이 흔들렸어요. 자전거 바퀴 소리가 빨라졌다 느려졌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여운에서 득두의 심장 고동소리를 듣는 듯했답니다.

득두의 이런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 줄 착각했어요. 왜냐하면 내 앞에서 머뭇거린 적이 두어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득두가 내 앞에서 자전거 속도를 줄이며 머뭇거릴 때 온몸으로 J에게의 리듬에 두들겨 맞는 황홀함을 느꼈답니다.

노연기 오빠,

그때 나에게 플레어스커트가 있었더라면 득두는 허영미라는 존재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을 거에요. 나는 허영미보다 키는 작지만 눈은 더 초롱초롱하거든요. 사실은 허영미보다 훨씬 작아요. 그래도 허영미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득두가 우리 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나는 허영미에게 모든 말을 털어놓았습니다.

허영미에게 털어놓으면 세상의 그 어떤 힘든 일도 툴툴 털고 일어설 힘이 생겼답니다. 허영미도 그랬을 거에요.

그런데 득두가 개입되면 우리 사이는 서먹해지고 갑자기 찬서리가 내리기 일쑤였어요. 나는 득두의 자전거 페달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뛰고 J에게 노래가 환청처럼 들려왔어요.

“제이 그대 모습 보이면, 난 오늘도 조용히 그댈 그리워…”

허영미는 득두가 지나가면 늘 먼 하늘을 보는 척했고, 한 손을 쭈욱 뻗어 코스모스를 가볍게 쓰다듬었습니다. 오히려 득두는 그런 허영미의

옆모습이라도 보고 싶어 안달하더라고요.


친애하는 노연기 오빠, 득두보다 훨씬 멋있는 노연기 오빠.

나는 용기를 내어 허영미에게 물었답니다.

“나는 득두가 차암 멋있어 보이는데, 너는 득두에게 관심있어?”

분명히 허영미는 득두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하였답니다.

허영미가 했던 말 중에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어요. 나와 득두가 J에게라는 노래를 부르며 코스모스 길을 함께 할 기회가 왔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당시 그 마음은 노연기 오빠를 알기 전이니, 저의 철없는 설레임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요.


노연기 오빠,

이번 편지는 이렇게 제 마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칠게요.

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플레어 치마입니다. 플레어 치마를 입고 득두의 가슴을 흔들리게 하고 싶어요. 이 늦가을의 바람이 코스모스 더미를 흔들고 득두의 마음을 흔들어 줄 거예요. 득두와 함께 마을의 새마을 카페에서 들려오는 J에게를 들으며 걷는 것이 저의 바람이에요. 노연기 오빠는 그곳에서 평안하셔요. 저는 이곳에서 그리워하겠습니다.

2만 2000년 전, 오늘, 오산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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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에서 뵙겠습니다. 오산희의 플레어 스커트와 득두와의 인연은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노연기는 오산희의 J가 될까요?

독자님의 첫번째 연애편지가 지금이라도 응답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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