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로우판, 그리고 다시 떠오른 그날 밤

by leolee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차량 하나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폭이었다. 간판은 대부분 전통 한자로 쓰여 있었고, 그 아래엔 하얀 조명을 받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천리웨이는 차를 골목 끝에 바짝 붙여 세운 뒤, 손가락으로 작은 식당을 가리켰다.


“여기예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집. 관광객은 거의 안 오고, 다 동네 사람들만 와요.”


간판엔 낡은 듯한 글씨로 ‘阿海魯肉飯’이라 쓰여 있었다. 벽돌처럼 생긴 붉은 외벽엔 낙서와 세월의 때가 겹겹이 쌓여 있었고, 안쪽에선 소년이 땀을 뻘뻘 흘리며 손님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뜨거운 열기와 진한 간장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상하게 정겨운 ‘밥 냄새’에 순간 멍해졌다. 언뜻, 어린 시절 외할머니 집에서 맡았던 고기 조림 냄새와도 비슷했다.

천리웨이가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아계세요. 제가 주문할게요. 맵지 않고 달콤한 스타일 좋아하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리웨이는 사장님에게 익숙하게 몇 가지를 주문하고는 돌아와 앉았다.


“루로우판 하나, 계란 추가. 거기에 단단면도 시켰어요. 대만에 왔으면 이건 기본이에요.”


잠시 후, 스테인리스 쟁반에 담긴 음식이 차례로 도착했다. 그릇 하나하나에 담긴 내용물은 소박했지만, 색은 강렬했고 냄새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불그스름하게 윤기 나는 다진 고기와 밥, 반숙으로 익힌 달걀, 그리고 짭짤한 국물이 자작하게 흐르는 단단면. 젓가락을 들기 전부터 마음속에서 어떤 갈증 같은 감정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거… 맛있겠네요.”

“드셔보세요. 한국 분들도 좋아하더라고요.”


나는 조심스럽게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단맛과 짠맛이 동시에 터지고, 고기의 고소함이 뒤따랐다. 중국에서와는 또 다른 향신료의 향이 뒤를 잇긴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씹는 동안, 잊고 있던 어떤 밤이 떠올랐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누나와 마지막으로 함께 먹은 저녁이었다. 검은 유리창과 조명이 어우러진 그곳에서 누나는 조용히 말했다.


“태겸아, 나 이혼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몸이 얼어붙어. 그날 이후로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질 않아.”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숟가락만 바라보다가 결국 울음을 삼키듯 한마디를 꺼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누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아닌 침묵으로 끝나는 이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누나는 코트를 사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마지못해 들어간 백화점에서 누나는 아무 말 없이 재킷을 골랐다.

그리고 며칠 후, 누나는 봉투 하나를 건넸다.

안에는 현금 1만 위안이 들어 있었다.


“이걸로 앞으로 필요한 거 준비해. 우리… 진짜 끝내자.”


그 순간을 떠올리자, 밥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천리웨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입맛에 안 맞나요?”

“아, 아니요. 너무 맛있어서요.”

“하하, 다행이다.”


식사를 이어가며 천리웨이는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다. 대만 사람들의 설 풍습, 가족 이야기, 서울에 가본 적이 있었던 기억까지. 항상 나는 이상하게 중국에서나 타이완에서나 서울에 가본 적이 있는 택시기사만 만나고,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일했던 택시기사만 만나는 게 좀 신기하긴 했다.

아무튼 그의 말은 끊이지 않았고, 그 틈에서 조용히 마음을 되짚었다.


‘나는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이 식당, 이 골목, 이 사람… 왜 이 순간이 이렇게 낯설지 않고 따뜻하지?’


천리웨이는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저는 택시 일 오래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렇게 설날에 혼자 온 손님을 만나면 마음이 짠해져요. 괜히, 말 더 걸게 되더라고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서글서글한 그의 눈빛이 마주쳤다.

잠시 망설이다, 처음으로 조금 길게 말을 꺼냈다.


“사실… 최근에 이별했어요. 설날도 혼자고,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여길 왔어요. 그냥… 어디든 가고 싶었거든요.”


천리웨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때 있죠. 나도 옛날에 그랬어요. 누구에게 말 안 하고 그냥 타이중까지 운전한 적도 있어요. 사람 마음이란 게… 어디든 도착해야 멈추잖아요.”


말끝에 둘 다 웃었다. 아주 작은, 그러나 깊은 웃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다시 차에 올랐다. 창밖엔 붉은 등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만의 밤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그 안엔 묘하게도 슬픔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호텔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네. 오늘…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내일도 대만은 계속 맛있고 따뜻할 거예요.”


차가 다시 도심을 향해 달려갔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더 이상 그녀의 흔적이 없었고, 이제는 조금씩… 새로운 기억이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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