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는 구름의 숲을 뚫고 천천히 하강했다. 창밖엔 회색빛 비가 고요히 내려앉고 있었다. 타오위안 공항의 활주로가 시야에 들어오자, 기장은 대만어와 영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국어로 착륙을 알렸다. 언어의 흐름은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귀에 착 감겼다. 설 연휴라는 건 동아시아 어딜 가도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일까.
비행기가 땅에 닿자, 내 속도 같이 조용히 착지한 듯했다. 이별 후 처음 맞는 설, 그리고 첫 혼자만의 여행. 한국의 겨울보다 조금은 더 습하고 따뜻한 이 공기가 낯설지 않게 느껴진 건, 아마 그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찬 기운 때문일지도 몰랐다.
입국심사는 길지 않았다. 외국인 줄에 선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달랐지만, 어디론가 향하려는 눈빛은 닮아 있었다. 여권을 건네며 웃으려 했지만,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 혼자 여행이세요?’라고 묻는 듯한 심사관의 눈빛에,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찾고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땐, 비가 조금씩 그쳐가고 있었다. 택시 승강장으로 향하려던 그때, 한 남성이 큰 팻말을 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천리웨이 陳立偉 - 예약자 이태겸 님”
팻말을 든 손은 작고 두툼했으며, 얼굴엔 쑥스러운 미소가 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제가 이태겸입니다.”
그는 반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啊~你就是韓國的先生吧?歡迎來台灣喔!”
(아~ 당신이 한국에서 오신 분이군요! 타이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의 말은 빠르고 쾌활했지만, 톤이 부드러웠다. 외국인이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반복해 주는 배려가 느껴졌다. 나는 미리 준비한 문장을 꺼내듯 대답했다.
“請多多關照。”
그는 웃었다.
“哇,你中文說得不錯耶!”
(와, 중국어 잘하시네요!)
트렁크를 들고 그의 차로 향했다. 검은색 도요타 승합차였다. 차문을 열자 따뜻한 바람과 함께 라디오에서 느릿한 대만 가요가 흘러나왔다. 운전석 옆에 작은 붉은 부적이 매달려 있었고, 대시보드엔 가족 사진으로 보이는 폴라로이드가 붙어 있었다.
“오늘은 좀 막힐 거예요. 설날 첫날이라서요. 다들 고향에서 돌아오는 길이거든요.”
그는 유창한 중국어로 말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몇 초 늦게 반응했다.
“네, 괜찮아요. 전 천천히 가도 좋아요.”
그 말은 내 의도와 조금 달랐다. 원래 말하고 싶었던 건 ‘이 길이 조금 더 오래 걸려도 상관없다. 낯선 도시를 오래 보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말이 어눌하게 흘러나왔다. 그래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차는 공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올랐다. 창밖엔 흐릿한 안개와 설 연휴의 풍경이 펼쳐졌다. 간혹 보이는 전통 시장 앞에선 빨간 등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거리엔 폭죽이 터진 자국이 검게 남아 있었다.
“한국에서도 설날엔 가족들이 모이나요?”
천리웨이가 물었다. 나는 짧게 ‘네’라고 답했지만, 이내 조금 더 말을 이었다.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고, 세배도 하고요. 요즘은 여행 가는 사람도 많아요.”
“아~ 대만도 비슷해요. 저도 아침에 가족이랑 밥 먹고 나왔어요. 우리 아버지가 택시 기사셨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일하는 게 괜찮아요. 가족은 이해해줘요.”
그의 말에서 묘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일하는 게 괜찮다’는 말, 그건 어쩌면 나에게도 필요한 말이었다. 일하지 않아도 무언가 해야 할 것 같던 그 겨울의 끝자락에서, 나는 여행이라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결국 이곳으로 나를 데려왔다.
그가 음악 볼륨을 조금 줄이고 창문을 약간 내렸다. 대만의 바람이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비행기 모드를 해제했다.
알림 수십 개, 그중 몇 개는 친구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열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이 공기 속에만 있고 싶었다.
도심이 가까워질수록 건물들이 조금씩 높아지고, 색이 다양해졌다. 회색 건물 위로 빨간 간판이 빼곡하게 붙어 있고, 네온은 아직 환하게 켜지지 않았지만 도시의 맥박이 느껴졌다.
“혹시 배고프세요?”
천리웨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가, 잠시 망설인 후 물었다.
“혹시… 추천해 줄 만한 로컬 음식점 있나요?”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那當然!有一家滷肉飯很有名,我帶你去吃吃看!”
(그럼요! 루로우판이 맛있는 집이 있어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방향을 살짝 틀어, 식당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 안에는 느긋한 대만 음악이, 창밖에는 비 갠 도시의 색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