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다.
투병을 하면서는 정말 정보에 따라
치료의 범위가 다르다.
오마야 수술을 하고는
병원에서 알아서 해준 거라고 생각했다.
두통이 있긴 있었으나 예전보다는 훨씬 줄어들었기 때문에 안일했다.
오빠의 친형(=앞으로는 "형님"이라 칭하겠다.)이 온 덕에
평일에 나는 출근을 했고 퇴근하고 나서 저녁엔 오빠와 시간을 보냈다.
괜찮은 듯 보였다.
그런데 두통이 다시 심해지고
구토가 심해져서
집 근처 병원에서 수액을 맞았는데
두통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수액을 맞으러 병원에 갔다.
사실은 이때 건대병원에 다시 갔어야 했다.
평일에는 집 앞 병원,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병원에
오빠를 힘겹게 차에 태우고 가서 수액을 맞았다.
나중에 안 사실은
가정간호라는 서비스가 있다.
병원에서 집으로 와서 수액을 놔준다.
오빠는 계속해서 밥을 거부하다가
어느 날은 풀린 눈으로 밥을 엄청 먹었다.
나는 좋아하기만 했다.
정말 멍청했다.
그때부터 오빠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오빠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그냥 먹는 모습이 좋았다.
어느 날은 자고 있는 데 소리를 질러서 급히 거실로 나가보니
화장실을 가다가 넘어져 있었다.
그 이후로도 넘어지는 일이 몇 번 있었다.
힘이 없어 넘어지는 줄 알았고
못 먹어서 빈혈 때문에 넘어지는 줄 알았다.
골절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다.
어느 날 오빠는 실신했다.
그냥 기절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울면서 진심을 전하면
오빠가 일어날 수 있을 줄 알고
누워있는 오빠를 안고 엉엉 울면서 일어나달라고 했다.
푹 자는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응급실을 갔어야 했다.
오빠는 알고 보니
뇌연수막에 있는 암 때문이 아니라
뇌수두증 때문에 힘든 거였다.
뇌수조에 물이 차서
옆의 뇌를 누르는 무서운 증상이다.
균형장애, 보행장애, 배뇨장애, 인지저하, 뇌손상 등 다양한 장애를 초래한다.
넘어졌던 것도 균형장애 때문이었다.
우리는
응급상황에서 척수액을 오마야로 뺄 수 있게 시술을 했지만
오마야는 그냥 말 그대로 물이 차면 뺄 수 있는 장치였다.
담당 교수도 오빠의 상태에 대해 무지했고
암, 항암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1~2주마다 병원에 갔었는데,
이 말은 매일 물을 뺐어야 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겨우 1~2주에 한 번 물을 뺐다는 소리다.
물은 뇌수조에 점점 찼고 뇌수두증이 온 것이다.
실신한 다음날,
나는 출근하고 오빠는 우리 엄마와 형님과 병원을 갔다.
바로 당일 입원을 했고 물을 빼니 좀 괜찮아졌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어눌한 말투였지만 통화도 했다.
우선 오빠의 상황에서는 물을 빼면 괜찮아진다.
라는 정보가 하나 생겼다.
물을 빼는 과정은 간단했지만 교수님은 매일 빼주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심각했을 때도 교수님이 일정이 안된다고 안 빼준 날이 많다.
퇴근을 하면 병원으로 가서 11시까지 오빠와 있다.
집으로 가고 새벽에 출근을 하고를 반복했다.
매일매일 병원에 갈 때마다 점점 나빠지는 상황에
집 가는 길에 내내 차에서 울기만 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회사(종로) - 병원(건국대) - 수원
스케줄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 엄마는
나를 위해 매일 저녁 건국대병원으로 와서
밤 11시에 집에 데려다주는 루틴을 반복했다.
엄마는 내가 쓰러질 것 같다며
휴직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고
고민 중이었던 나도 결국 휴직을 결정했다.
휴직을 결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회사에 가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야근, 출장을 마다하지 않는
평범한 길을 걷던 내가
처음으로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빠를 보내면
남은 생을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빠를 위해
또 오빠를 사랑하는 나를 위해
나도 휴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