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너무 충격적으로 들었고, 또 너무 공감했던 말이 있다. 바로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라는 말...
당장 칫솔 살 돈이 없는가? 그럼 내년에는 임플란트 비용을 청구받을 것이다.
당장 매트리스를 살 돈이 없는가? 그럼 내년에는 척추 수술을 받게 될 것이다.
당장 그 혹을 검사받을 비용이 없는가? 그럼 내년에는 3기 암 치료비를 내게 될 것이다.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
사람의 인생에는 분명 자신이 택한 선택으로 정해지는 가난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가난도 분명히 있다. 가난한 것도 억울한데 이자까지 붙는다니, 그렇다면 평생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그리고 갑자기 나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어려서 우리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해에 사촌형이 같이 사업하자는 말을 그대로 믿고 전 재산을 혈육에게 뜯기고 사기를 당하셨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재수 옴 붙었다'라는 말처럼 진짜 옴까지 붙으며 온몸을 긁어가며 아등바등했고, 그때 나어린 핏덩이인 나는 집안의 큰 혹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날 그 아버지의 사촌형이 우리 집에 와서 핏덩이이자 짐덩이인 나를 보고, 쟤는 그냥 보내주자며 주사 한 방이면 된다는 조언 아닌 조언을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 했다. 어머니는 화를 내며 그 사촌을 집에서 쫓아내고는 오열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이후로 그 사람이 나에게 해코지할까 두려워 항상 직접 붙어 계셨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도 가난은 변함이 없었다. 전 재산이 제로인 상태에서 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부모의 사정은 이루 말해 무엇하랴. 항상 반지하를 찾아 이사 다녔고, 부모님은 빠짐없이 맞벌이를 하셨고, 가족들은 항상 아낀걸 또 아끼며 살았다. 나도 눈치가 있었던지 크레파스의 다 닳아 없어진 색을 부모님에게 새로 사달라고 끝끝내 말 못 하고 친구들한테 빌려만 썼다. 나는 학교에 갈 때 학용품을 못 사가는 날이 많았고, 그래서 벌을 받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단련까지 되었다. 항상 돈과 연관된 것들만 생기면 움츠렸고, 친구와 싸우다 친구의 안경이 부러진 후, 그 안경이 비싸다는 주변 친구들의 말에 집에서 말도 못 하고 혼자 계속 울었었다. 학교에서 산수경시대회 1등을 하고나서 나에게 뭐든지 사준다는 부모님의 말에도 갖고 싶었던 장난감과 소년중앙이라는 보고 싶었던 만화책을 뒤로한 채 기꺼이 학용품을 골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녀석은 가난을 알기에는 어린 나이에 얼마나 많은 어른스러움을 강요받았던 걸까? 싶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영등포에 염원하던 아파트를 장만하셨다. 오래되어 많이 낡은 싸구려 아파트였지만 엄하고 평소에 웃음기 하나 없던 아버지는 그 집을 장만하기 이전부터 항상 웃음을 얼굴에 가득 품고 퇴근하셨었다. 집 장만에 모든 것을 맞춰 전 재산을 집에 투입하였기에, 나에게 있어서는 이사 간 것 말고는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내 집이 생겼다는 마음에 심리적 안정감이 남달랐으리라 싶다.
집을 장만한 이후로 조금씩이지만 꾸준하게 우리 집은 번창했다. 그러나 자린고비였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고기반찬 한번 쉽게 드시질 않으셨다. 그렇게 꼿꼿하시고 돈 한번 허투루 안 쓰시던 아버지는 어느 맑았던 여름날 생을 달리하셨다. 간염이었다. 쉬면 낫는다는 그 병... 가난과 싸우느라 항상 쉴 수가 없으셨던 아버지는 끝내 간염이 간경화가 되고 간암이 될 때까지도 못 쉬셨다.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도 당신은 간암 말기 때 그제야 알게 되셨다. 그 시절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게 못내 억울했다. 돈 한번 제대로 벌어서 효도 한번 못한 것도 억울했고, 돈 한번 제대로 못쓰시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억울했다. 돈이 뭔지? 가난이 무언지?
아버지가 물려주신 성실함과 근면함이라는 유산들을 가지고, 나머지 세 식구들은 씩씩하게 나아갔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게 되고 돈도 벌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택해졌던 가난은 어쩔 수 없었지만, 후천적인 가난은 어떻게든 피해보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차츰 회사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아직은 몸에서 떨어지지 않은 가난을, 갑자기 없어지면 어색할 것 같은 가난을 짊어지고 한 걸음, 또 한 걸음씩 나아갔다.
어느덧 나는 40을 넘기고, 누군가 원하는 좋은 아파트와, 누군가 원하는 좋은 차를 타고, 누군가 원하는 좋은 봉급을 받으며 살고 있다. 아버지대의 찢어지는 가난은 아버지대로 남겨두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근면함이라는 소중한 유산을 가지고 경주하여 인생의 7할 동안 끈덕지게 붙어있던 가난을 끝끝내 몰아내었다.
지난주에 아버지 당신의 기일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농담을 하면서, 아버지와의 추억도 떠올리며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에게 효도 한번 못했지만, 아마도 아버지도 지금의 나를 보면 처음 집을 장만하셨을 때처럼 환하게 웃으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기적으로 시대적으로 잘못 태어난 아버지의 가난에는 이자가 붙었지만,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지고 좋은 때를 만났던 나는, 내 가난을 이겨내면서 묵묵히 걸어나아 갈 수 있었다. 분명 내 자식들에게도 아버지의 가르침을 물려줄 생각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불현듯 나타나는 가난에도 내 자식들 또한 나처럼 잘 이겨내리라 생각한다.
가난에는 분명 이자가 붙는다, 하지만 나는 그 가난을 모두 상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