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적
친구라는 단어를
벗이라고 표현하는 낭만에 이끌렸었다.
과거 80년대를 묘사하는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친구를 기꺼이 벗이라 칭하는 그때 그들의 모습에
그냥 마냥
설레었었다.
벗은 사람일 수도 사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친구라고 칭하는 것보다
더욱 온기 있다.
'마음을 두고 기댈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벗의 정의보다는
그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미사여구 따위가 아니어도
좀 더 명확한 표현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저 나도 그러한
벗이라는 것을 갖고 싶었고,
그러한 벗이 되고 싶었다.
희구하는 마음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인가에
항상 의문을 품었던
그 젊은 날에
나는 벗이라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었고
애증 한 꼬집, 반목 한 꼬집 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인연을
그렇게 보냈었다.
시간이 지나서
인간관계에 대해
그리고 벗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그 안에서도
지속될 수 있는 인연
즉 서로에게 벗이 되는 것에는
조금은 느낀 바가 있다.
서로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앞으로 나아갈 힘이 부족할 때
친구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만으로도
힘을 낼 수 있는 연료나 촉매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아직은 네가 모자라다는 것을 알지마는
내가 너를 믿고
네가 그것을 이겨낸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사람아"
과거에 매여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
만날 때마다 과거 회상씬만 풍성한 모임은
모임자체의 목적이 변질될 가능성이 크고
그 변질들이 삶에 미치는 영향들은
그 개개인에게
분명
유리하지도
유쾌하지도 않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내가 그 사람과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 준비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다.
무작정
만남시의 대화 주제들을 사전에 계획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원하는 화제를
만나고 나서
내가 기꺼이 꺼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이고
그런 것들이 있어야
비로소
대화라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런 대화는
다음 만남의 연결고리가 될 것이며
그렇게
인연으로 이어지고,
벗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지속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연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누군가의 슬픈 일을 슬프다 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군가의 기쁜 일을 나 또한 기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안 좋은 소식을 들으면
그 안 좋은 소식을 내 위안으로 삼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차고 넘친다.
내 기쁨을 순수하게 함께 해주는 타인이
나의 벗에 대한 기준에
가장 명확하게 들어맞기도 한다.
그러한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억지 연기를 할 필요는 없다.
순수하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저 서로에게 벗이 아니라는 것뿐이니까
지인이라는 것
인연이라는 것
친구라는 것
그리고
내 젊음이었던
그 시절의 그날부터
나의 가슴을 항상 뛰게 만들었던 단어 '벗'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손절하고, 손절당하고
그렇게 수없이 걸러져서
남게 된 인연으로
아름아름 만들었던 그 이름
앞으로의 삶에서
내 인생 최고의 영광의 장면은
세상을 살아가며 묵묵히 버티며 챙겨 온 전리품인
나의 사람이
나의 영면을 보고
진심으로 애도하는 장면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