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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선 Dec 04. 2024

33. 나는 4번의 유배를 당했다(2)

잘 나가다 한강에 빠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서울시청으로 들어갔다.


시로 가서는 지나간 구청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그만큼 바쁘게 돌아갔다. 맨 처음 상륙한 곳이 환경관리실의 환경정책과 환경협력팀장 자리였다. 당시는 고건 시장님 때였는데, 녹색서울시민위원회라는 아주 신망이 높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위원회를 관장하였다. 당시 노을공원을 골프장으로 전환하는 문제로 서울시와 녹색위가 맞붙어 한 동안 정신없었던 기억이 있다. 환경과 관련된 국·내외 협력업무를 맡았었는데, 특히 당시 강홍빈 행정1부시장님께서 이클레이(ICLEI, 환경을 위한 세계지방정부) 상임위원이셔서 여러 가지 국제업무까지 있었다. 해서 정신없이 지난날을 잊고 지냈고, 서서히 새로운 큰 집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심사평가과에서 있다가, 아이들 아토피 때문에 일 가정 양립차원에서 서울시립대 기획과장으로 가기도 했다. 생각 밖으로 거기서 3년 반동안 대학교의 이모저모 일을 하다가, 오세훈 시장님 취임하셔서 창의행정을 펼치기 시작할 때 초대 창의과 주무팀장으로 발탁되어 시로 돌아왔다. 나름 우리시에 창의의 기틀(창의상 제정, 창의성과포인트 제도, 기관 포상제도, 창의사례발표회 등)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노인복지과 주무팀장으로 발령이 나서 노인 행복 프로젝트(데이케어센터 등)를 만들기까지 워크홀릭처럼 정신없이 일하고, 가끔 노는(술 한잔) 생활이 지속되었다. 이쯤되면 심심하지 않은가?      


드디어 2번째 유배의 서막이 시작된다.      


위와 같은 길을 걸어오다 보니 나는 어느새 사무관 고참이 되어 있었다. 내 고시 1기수 선배들이 승진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직에 자리잡고 있었고, 나도 마침 승진 거의 1순위인 언론과 신문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나의 직속상관이셨던 노인복지과장님께서 부시장님께 적극 천거해 내가 신문팀장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술을 잘 먹는다는 이유였을까?)     


그러나 만만치 않았다. 백 여명에 이르는 기자들 소속과 이름 외우는 것부터, 그날 그날 쏟아져나오는 수많은 기사 거리 중에 어떤 것을 선정해서 미느냐도 어려웠다. 현실적으로 매일 새벽부터 출근해서 기사들 정리하여 시장님께 보고드리고, 아침부터 점심 저녁 기자들 상대로 술 먹는 것도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신적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꼈다. 빨리 승진해서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만이 살 길이다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어짜피 가야할 길이라면 즐겁게 가자라고 생각하고, 기자분들과 친분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점차 기사내용에 대해서도 서로 소통하는 관계도 되었다. 어느 젊은 기자는 나에게 팀장님은 꼭 우리 편집국장 같아요. 기사 제목까지 뽑아주니 말이예요.”라고 하기도 하였다. 신문팀장이지만 방송국 기자들과도 친분을 쌓아 그날 그날 방송 취재거리를 유도 내지는 경쟁시키기도 하였다. 힘들지만 재미나게 지내고 있었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나름 인정받은 것으로 안다.(술자리를 안 빼니까 그랬을 듯....)     


그렇게 5개월여가 지나고, 4급 서기관 승진계획이 떴다. 다른 때보다 승진인원이 많아 총 14명이었다. 사실 나는 신문팀장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승진 욕심이 처음에는 없었다. 1년은 해야 승진하리라 예상했었다. 헌데 14명이나 승진한다니.... 해서 나도 차분히 승진가능성을 점쳐봤다. 당시는 고시 비고시 정확히 나누어서 반절씩 하는 관례가 있었으므로, 비고시는 관계없고 고시 중에 서열 7번 안에 들면 승진하는 거였다. 나는 세고 세고 또 세어봤다.      


나보다 짬밥이 많고 현재 승진하는 주무팀장 자리에 있는 사람이 딱 4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5번째, 현재 시장 수행비서하고 있는 고시 1년 후배를 더 빨리 쳐준다고 해도 못 해도 6번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승진의 윤곽이 드러날 즈음, 느닷없이 내 직속상관인 언론과장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강팀장, 이번 승진은 주무팀장 1년 이상이 되어야 한다네, 자네는 아직 6개월밖에 안 되었으니, 이번에는 안되는 것으로 포기하고 일이나 열심히 하게라고 하시는 거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주무팀장 1년 이상이 되어야 승진시켜준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엄연히 1년 이상된 사람만으로는 고시출신이 5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면 나머지 2명을 주무팀장 1년 미만에서 뽑아야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빠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경력면에서나 현재 하고 있는 일 또는 자리 면에서나....     


답답한 마음에 나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선배 장모 국장님을 찾아갔다. 그분 역시 전체 면면을 보시더니 같은 의견이었고, 그래도 승진은 여러 가지 변수가 있으니, 인사의 키를 가지고 있는 시장님 오른팔(정무직)인 모 국장을 찾아가 보라 하셨다. 나는 승진 문제를 누구에게 청탁하여 하고 싶지도 않고, 더구나 정무라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아서 찾아가지 않았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신문팀장 자리는 자고로 승진에서 매우 앞서는 우선순위이고, 더구나 많은 기자들을 등에 업고 승진 때 기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자리다. 허나 나는 많은 각 언론사의 고참 기자 형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면서도, 내 승진과 관련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기자들의 힘을 빌어 승진하고 싶지 않았다. 진심이다.     


당시 내 절친인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마침 인사과에 있었고, 특히 5급 승진 담당이었다. 그즈음 이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 선섭아, 너 대단하다. 승진대상자 중에 니가 다면평가 1등이야라고 했다. 순간 나는 그 말이 너 승진순위 1등이야 라는 말로 들려서 승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뿔싸! 막상 승진심사를 마치고 까보니 내가 명단에 없단다. 월요일 아침 발표할 예정인데, 금요일 퇴근시간 무렵에 시장실에서 만난 시장 수행비서 친구가 아쉽다는 말을 해서 알게 되었다.      


이제 여기서부터 사달이 또 한 번 시작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실제로 누가 승진이 되었는지 알아볼 생각도 없이 바로 그 오른팔 국장님 방으로 쳐들어갔다. 실제로 비서가 말리는 데도 그냥 밀고 들어갔으니 쳐들어갔다라는 표현이 틀리지는 않는다. 나는 평소 그 국장님과 홍보기획회의 등에서 자주 봐서 안면이 있기 때문에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아니 흥분으로 외쳤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이번 서기관 승진 인사는 개판입니다.  인사가 만사인데 인사를 잘못하면 조직이 망하는데.... 국장님 어찌 인사를 이렇게 엉망으로 할 수 있습니까? 무슨 근거로 이렇게 하신 겁니까?”라고. 그 국장님은 벙 쪄있다가, “인사를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슷한 말을 되뇌이고 그 방을 나왔다. 사실 이미 엎지러진 물, 거기서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내 직속상관인 대변인실로 들어가 이번엔 다르게 말했다. 나름 차분하게.... “국장님, 저 이번 승

진에서 안 됐습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저는 이런 조직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단 다음 주 한주 연가를 내서 쉬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그리고는 나를 붙잡는 대변인님을 뒤로 하고 그 방을 나왔다. 내 사무실로 가서 바로 대충 짐을 싸고 옆자리 언론행정팀장 형님께 저 다음주 한 주 연가 갑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날 저녁 마침 시장실의 파견나온 경찰과 안기부 사람들과 저녁약속이 있어 먹고 있는데, 계속해서 대변인께서 전화를 하셨다. 나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대충 자초지종을 아내에게 이야기하고, 아이들 데리고 여행가자고 했다. 아내는 여보, 6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으니, 힘 내세요라고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나는 여행 짐을 싸서 아이 셋을 데리고 멀리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떠나는 길에 아차, 연가신청을 하지 않고 나왔네생각이 들어, 사무실로 들어가 연가신청을 했다.      


컴퓨터를 켜니 도저히 이대로는 분이 풀리지 않아 한 가지를 더 했다. 바로 그 오른팔 국장님께 이번 인사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서 A4용지 2장 분량의 메일로 보냈다. 요는 조직에서 인사는 만사요, 인사는 예측가능성과 합리성이 있어야 하며, 그때그때 기준이 바뀌어서 혼란스럽게 하면 안 된다. 인사가 제대로 되어야 조직이 안정되며, 그래야 직원들이 예측가능성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게 된다. 시장님께서 구현하고 싶은 창의행정도 적극행정도 시 전체적인 인사를 직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운영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결국 시장님을 욕 먹이는 것이다.“라고....(문장 자체는 멋지지 않는가?)     


마침 휴일근무 중이던 옆자리 언론행정팀장 형님이 제발 강팀장, 한 번만 참아, 이번만 참으면 다음번엔 반드시 되는데, 메일도 보내지 말고, 연가도 내지 말고.... 정 그러면 하루 이틀 머리 좀 식히고 와나는 형님, 고맙습니다만, 이런 데서는 저는 도저히 근무하기 싫습니다. 일단 일주일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사무실을 나와 아이들과 저 푸른 강원도를 향해 떠났다.     


재미없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듯 하다. 남은 이야기는 가급적 짧게 하겠다.     


그리하여 모처럼 가족여행이 시작되었다. 정처없이 떠난 여행이었기에, 우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떠났기에 신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하는 여행이었기에 일단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월요일 아침부터 내 전화기는 불이 났다. 사실 매일 새벽부터 신문팀장이 주축이 되어 언론기사 내용을 정리하고, 또 언론에 무슨 내용을 내보낼지도 결정하고, 매일 기자들의 여러 가지 민원에 응대하는 게 신문팀장의 역할인데, 갑자기 내가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무실은 물론 기자들도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놀란 것이었다. 해서 언론과 사무실 직원, 기자들, 또 나를 아는 동료들이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나는 이대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하고, 나름 앞으로 어떻게 하지?‘를 고민하면서 강원도 영월을 찾았다.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를 찾아 맑은 하늘을 보며 사육신 생육신을 떠올렸다.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과, 그 왕을 위한 충성의 뜻을 굽히지 아니한 사육신과 생육신의 삶이 내 삶에 살짝 투영되었다.(사실은 말도 안된다. 그깟 승진에서 누락되었다고 사육신 생육신에 비유하다니....)      


아무튼 말도 안되지만 나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청쪽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를 징계준다는 것이다. 항명죄로. 나에게 여러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징계를 줄 테면 줘라. 나는 징계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의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그렇게 삼 일째 되는 날 아침에, 나와 친한 1진 기자 형이 나에게 전화를 하셔서 정말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강 팀장, 아무 일도 없게 우리 기자들이 할 테니, 일단 당장 복귀만 하게. 뒷일은 나와 다른 기자들이 처리하께나는 망설이다가 그래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어짜피 벌어진 일, 나를 이렇게 찾아주는 사람이 많을 때 다시 가서 일하자. 6개월만 더 버티자.‘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그날 오후 사무실로 복귀했다.(참고로 이 기자 형들은 15년여가 지난 지금도 자주 연락하고 만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이다. 사무실 복귀하자마자 들은 이야기는 발령이다. 며칠 뒤에 있을 정기 인사에서 나를 좌천발령시킨다는 것이다. 이미 대변인실(언론과) 명의로 행정국에 기관전출 신청 공문이 갔다고 한다. 나는 인사과장님과 행정국장님을 찾아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지만, 저의 진심은 이런 것입니다하고 그 오른팔에게 보낸 메일을 그대로 보여드렸다. 그랬더니 두분 다 소문에는 아주 나쁜 놈이라 들었는데, 대화를 해보고 글을 보니 그런 게 아니네라며 대변인실에서 전출요청 공문을 철회하면, 행정국에서는 굳이 발령을 내지는 않겠다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 뒤로도 대변인실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대변인께서는 나는 모른다. 내 손을 떠났다라고 하시고, 언론과장은 그냥 조용히 가라고 하신다. 언론특보라는 직책으로 시장님의 왼팔(?)이 계셨는데, 이분은 강하게 나에게 나가라, 강팀장하고는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둘만의 대화 중에 나에게 책상 위의 물병까지 던지시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화를 내시기까지 했다.     


이런 와중에 기자단이 나섰다. 주로 각 언론사의 1진 기자들이 부시장, 대변인, 언론특보 등에게 도대체 강 팀장을 왜 보내느냐? 잘 하고 있는데, 그깟 승진 안 돼서 며칠 쉰 거 가지고 그러느냐? 그럴 수도 있지. 전에는 더 한 사람도 있었는데....“라고 항의성 읍소를 계속하였다. 나를 잘 아는 직원대표들도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노력은 다 소용이 없었다. 나는 결국 한강사업본부 기획예산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승진 1순위 자리에서 갑자기 승진이 되지 않는 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2번째 유배가 시작되었다.     

이때 한강 물이 넘쳤다는 후설이 있다.     


P.S.

1. 그때 나 대신에 승진한 두 명이 있다. 물론 두 명 다 당시 승진자리인 실·국 주무팀장은 아니었다. 주무팀장 1년 이상은 나를 배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룰 같다. 한 명은 고시 2년 선배, 한 명은 고시 1년 후배인데 승진자 중에 유일한 여성이었다. 2년 선배가 승진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보다 오랫동안 고생했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난 지금도 후배가 나 대신에 승진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본인도 승진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여성도 한 명쯤은 있어야지라는 게 이유가 될까?     


2. 이후에 실제로 나는 2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후배들까지 다 승진한 뒤에서야 뒤늦게 승진을 하게 된다. 좌천 발령의 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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