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믿음이 미신이 되는 순간.
TV를 켜면 너무도 당연하게 오컬트 관련 콘텐츠들이 나온다. 비단 영상 매체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는 지금 미신 중독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무려 그 탄핵 심판에 올라와 있는 대통령조차 ~~ 도사니 ~~ 스님이니 하며 미신 스캔들에 몸살을 앓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여기서 그런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만이 미신으로 이야기하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이 미신이라는 것의 증명보다 먼저 우선되는 지점이 있다. ‘어떤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 즉 신뢰라는 지점에서 나는 이 미신의 범주를 확장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 신뢰라는 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규정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바로 이데올로기다. 이 복잡 다양한 세상을 해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취합해 자기 생각을 결정한다. 그렇게 형성된 사상을 하나의 이정표로 삼고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을 한 발짝, 두 발짝 나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을 믿을지를 선택한다. 이루 말하길 이 다원적인 세상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있다. 그 믿음이 놀랍도록 해롭다고 해도 말이다. (심지어 이 해롭다고 평하는 것 자체 마저, 내가 무언가를 믿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믿음들은 너무도 해롭다. 최근에 본 <추락의 해부>에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건의 진실이 아닌 재판대에 올라온 여성의 사생활에 대한 점뿐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영화에서 표현된 방청객들이 무언가를 믿고, 그 가십을 소비하는 측면으로 볼 때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더 나아가 최근 공개된 <소년의 시간>에서의 표현들은 어떤가. 인터넷에 무분별하게 노출된 아이가 형성한 사상은 놀랍도록 유해하다. 소위 말하는 남성주의를 표방하는 레드필이론 따위까지 닿게 되면 이는 더 이상 사상의 영역이 아니다. 유해한 사이비의 영역까지도 닿아 있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해로운 믿음에는 세상을 양분할 수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기저에 깔려있다. 산 것과 죽은 것, 나쁜 것과 좋은 것, 순수한 것과 더러운 것 등등. 이러한 양분법적 시선은 놀라울 정도로 세상을 단순화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배척하기에도 아주 효율적이다. 너무 명료해서 어쩌면 일종의 진리와 같은 답을 준다고 보여 사상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만든다.
다만, 정말 그럴까? 세상은 그렇게 쉽게 칼로 물 베듯 분류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일까? 나는, 단언하건대 세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세상을 쉽게 정의하려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엔 사기꾼들뿐이다. 단순한 문장은 사람들을 쉽게 현혹하니까. 생각하는 일은 너무 어렵고 귀찮은 일이니깐. 단순 명료하게 타인이 내려주는 문장을 그냥 그대로 옮겨 적는 일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귀찮은 설명을 피할 때 유명인의 문장을 인용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쩌면, ‘무언가를 믿는다.’ 보다 ‘무언가를 의심’ 해야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일일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미신의 정의를 한 번 톺아보자.
미신(superstition): 어떠한 실증적 근거 없이, 두 사건 간의 인과적 연결에 대한 마술적 사고 또는 비합리적 신념을 유지하는 것.
결국 중요한 건 실증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의심하고 그 근거를 찾는 일을 병행해야 이 믿음이 미신을 피할 수 있다.
이분법적 사고를 다시 소환해 본다. 어쩌면 우리는 경계를 짓는 것에 너무 쉽게, 그 경계선을 믿어 왔을지도 모른다. 인간과 기계, 자연과 문화, 여자와 남자, 과거부터 내려온 모든 ‘당연시되어 온 것’들 조차 우리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어쩌면 미신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살아있음과 죽음마저도 말이다.
영혼이나 의식 따위가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죽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물은 온도에 따라 그 형태가 변한다. 더 세부적으로 보면 얼어있거나 흐르는 형태의 차이는 단지 원자와 분자의 진동이 온도에 따라 더진동하냐 아니면 덜하냐의 차이일 뿐이다. 물뿐만이 아닌 모든 물질은 이렇게 미시세계적 관점에선 끊임없이 생동하고 있음에도, 이를 ‘유기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는 ‘무기적인 존재’의 의식의 가능성조차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지점에서 인간도 결국 물질이라는 점을 상기한다. 인간의 소양이 의식이라면 어쩌면 의식이라는 것은 물질의 소양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그 의미들을 지워버린다. 이것만큼 ‘미신적인 사고’가 어디 있을까.
우리는 이 다름이라는 경계선을 그어놓고 서로를 향해 총과 칼을 겨눈 사회에 살고 있다. 상기한 <추락의 해부>나 <소년의 시간>에 나온 것처럼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건 말 그대로 ‘믿기 힘들 정도로’ 존재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생각도 든다. 당장 인터넷을 몇 분만 유영해도 세상은 서로를 삭제하려 하는 듯 혐오와 분노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이 ‘다름을 믿는 것’을 우리는 이제 의심하고 해체해서 좀 더 본질적인 대화를 해야 할 때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닿는다. 아니 ‘이제’는 너무도 나약한 말이다. 아마 ‘언제나’ 그랬을 것이다. 다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이 세상이 부여하는 기존의 믿음을 의심해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한다. 수많은 혁명운동과, 인권 운동을 떠올린다. 노예의 해방, 여성의 해방, 동물권의 해방,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과거엔 당연하지 않았던 믿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신음하는 이 시대에서 이제 무엇을 ‘해방’ 해야 할지를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세상을 너무 몰라서 그 답을 찾지 못했지만.
결국 이 긴 글을 쓰면서도 아직도 현재의 미신의 시대에 대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는 점에서 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읽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지독하게 지루하고 지리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ps. 작은 실천 하나를 제안하자면,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는 태도를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쩌면 세상은 동일 선상에 놓인 스펙트럼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나와 상대를 동일 선상에서 놓는 것부터 우리는 이해라는 궁극적 지점의 출발선에 서는 일이 되는 게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게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앞으로의 희망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