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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관찰자 Nov 01. 2024

미국 고모네 집으로

곧 괜찮아질 거야...

 정신과 전문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지만 우리 부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이 잘못되어 왔는지 혼란스러웠고 정신과 약을 아이에게 먹이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다. 결국 부모 잘못이라고 말할 것이 뻔한 상담에 대해서도 나는 극심한 거부감이 들었을 뿐 아니라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 자체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 아이가 왜? 의사의 진단과 처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순하게 아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나타난 증상 정도로만 이해하고 학교를 당분간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미국 시애틀에 계신 고모에게 가서 한 달 정도 지내면서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레 치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화로 고모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아 2주 만에 준비해서 바로 아이를 미국 시애틀로 보냈다. 아빠는 아이를 혼자 멀리 보내는 것에  불안해했지만 아이는 흔쾌히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고 나도 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지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바로 추진해 버렸다.


 고모는 시애틀 공립학교 수학 선생님으로 일하시는데 방학이라 시간적인 여유가 되었고 마음이 힘들어서 온 조카 손녀를 알뜰히 보살펴 주셨다. 날마다 세 번의 식사를 집에서 대부분 차려 주었고 저녁 식사는 매일 새로운 음식으로 준비해서 다양하게 맛볼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시애틀 곳곳 경치 좋은 곳도 데리고 다니며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집에서 책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아이를 이끌어 주셨다. 아이랑 함께 지내면서 관찰한 결과 고모가 보기에는 단지 번아웃 증후군 같다고 하시면서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왠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그때 살짝 들었었다.


  고모는 넓은 마당에서 닭을 여섯 마리 키우시는데 집에서도 강아지에 대한 애착이 깊었던 딸은 그곳에서도 닭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듯했다. 특히 봉구라는 수탉이 간식을 달라고 달려들기도 하고 자기의 다리를 자꾸 쪼아대서 상처를 입고 아프다고 했는데 여섯 마리 닭들 중에 봉구를 제일 좋아해서 세밀하게 그림까지 그려서 고모할머니께 드리고 왔다.  딸은 그곳에서 닭들을 보며 느낀 점을 글로 적어 읽어 주었는데 넓은 마당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마음대로 흙을 파고 렁이를 잡아먹는 닭들처럼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사는 닭들이 낳는 알들은 알록달록 모양도 크기도 제 각각이었지만 신선하고 맛도 훨씬 좋다고 했다.  자신은 공장 안의 닭들처럼 좁은 공간에 갇히어 꼼짝도 못 하고 똑같은 모양의 달걀만 생산해 내야 하는 닭은 되기 싫다고 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고려해 보라고 한 것에 대한 딸아이의 대답이었다. 아이의 자퇴의지는 강해 보였고 미국에서 학교 다니는 것도 싫다고 했다. 아이는 고모할머니와 할머니 가족들이 잘해 주셔도 눈치가 보여 다소 힘들었는지 미국에 간지 한 달이 채 안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고모의 방학도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더 부탁드리기 어렵기도 했다. 아이는 집에 와서 미국 고모 할머님이 날마다 새롭게 해 주셨던 음식들을 잊지 못하고 집에서 하나씩 요리해 보았고 덕분에 우리 집 저녁 식탁은 큰 아이가 차려주는 밥상으로 한동안 새롭고 신선했다. 그러나 중학교로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이의 문제 행동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혼자서 버스를 타거나 동네 마트를 가지 못 했고 길에서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도 무서워했다. 특히 또래 친구들을 길에서 만날까 극도로 두려워했다.  


 되돌아 생각해 볼 때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가끔씩 "엄마, 나 홈스쿨할까?"라는 말을 꺼내긴 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가 학업이나 교우 관계에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였기에 그대로 학교를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만 대답했었다. 아이랑 하루 종일 함께하며 학교의 모든 커리큘럼을 집에서 지도한다는 것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초등 고학년이 될수록 친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에 대해 대처를 잘하지 못하여 스트레스를 받는 일들이 종종 생겼다. 아이는 학교에서 배려상을 받을 정도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살피고 잘 도와주는 편이어서 고학년이 될수록 또래 관계에서 자신을 잘 보호하지 못하여 힘들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학교 수업이 온라인 수업으로 대부분 대체되었다. 그로 인해 학교에 가는 날이 적어지면서 딸아이는 그동안 원했던 홈스쿨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게 되어 그 시기를 잘 넘기는 듯했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부쩍 몸이 성장해 버린 남자아이들을 딸아이는 무서워했고 여자 아이들 무리에도 속하기 어려워하는 것이 보였지만 다른 아이들도 으레 겪으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만 여겼다. 중학생이 된 만큼 일일이 아이를 따라다니면서 체크하는 것도 좋지 않아 보였고 앞으로 독립해서 한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이상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의 어려움은 스스로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점이 전제되어야 했다. 즉, 마음이 건강한 아이였다면 이런저런 관계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배워나갈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적절하고 균형 잡힌 대인 관계 형성은 정상적인 성인 어른도 정말 잘 해내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는 것은 아이에게 그럴 수 있는 마음의 힘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뇌의 자율신경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단순히 환경의 변화를 준다고 해서 해결이 되거나 개인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일단 나의 조울증부터 약물치료를 하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양극단을 오고 가는 것이 나의 성격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병증이었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지만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를 돌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외부의 활동을 접고 나는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했다. 무조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와 아이가 다시 일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대학 시절 받아 보았던 상담치료는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아서 나 자신의 내면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명상 침묵 기도와 심리상담 관련 책들을 읽는 것으로 대체했다. 중학교 2학년인 아이에게는 약을 억지로 먹일 수 없어 약물치료는 일단 보류하고 상담치료는 마음에 드는 상담 선생님을 찾아가 받기로 아이를 설득하였다. 아이 스스로도 우울, 강박, 불안, 대인기피 등으로 마음이 힘든 것을 알기에 동의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20회기 이상 상담받으러 다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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