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친할머니집이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형제자매분들이 잠깐씩 쉬어가는 모두의 별장처럼 쓰고자 친정 부모님이 편리하게 현대식으로 수리를 했었지만 여러 이유로 그동안 시골집은 버려져 있었다. 시골집은 추억에 존재하는 집이 되었고 같은 마을에 본가가 있는 큰고모부만이 15년의 세월 동안 가끔씩 들려 눈길을 주고 잡초도 제거해 주시고 때가 되면 매년 집 근처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도 돌보아 주셨다.
그런 시골집이 나의 마음의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어 재작년 여름에 병든 동물이 숨어 지내듯 한동안 홀로 지내게 된 소식은 온 집안을 깜짝 놀라게 했다. 고모들은 큰 조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들 의아해하고 걱정을 했지만 어릴 적부터 큰 조카에 대한 애정이 가장 컸던 큰 고모는 가족 모임에서 시골집에서 수도승 같이 지내고 있던 나를 가족들에게 이해시켜 주시고 안심시켜 주셨다. 사실 그 누구에게도 나의 일을 말하지 않았기에 큰 고모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잘 아시지는 못 했다. 다만 15년 넘게 결혼 생활을 한 중년의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방황의 시간으로 받아들이시는 듯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은 엄마가 먼저 떠나버린 시골집을 당차게 떠나 서울에서 홀로 대학을 졸업한다. 준비하고 있던 임용고시 합격이 잘 되지 않던 중 남자친구가 먼저 합격하자 마음이 무척 상해 떠나온 시골집을 아주 오랜만에 찾아가게 된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자주 해 주시던 음식들을 하나씩 요리하며 시골집에서의 추억을 하나씩 소환한다. 그리고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계절이 지나감에 따라 주인공의 마음도 어느덧 조금씩 치유되어 간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온갖 스트레스 가운데 처음 중간고사를 치른 큰 딸이 서울에서 놀러 온 이모와 어린 사촌동생을 배웅하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다. 학교를 계속 다니면 죽을 것 같고 전공으로 배우고 있던 클라리넷도 못 하겠다고 청천벽력 같은 말들을 쏟아 내었다. 딸아이의 고집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우리 부부는 딸아이가 그다음 날부터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지내는 것을 결국 받아들여야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그제야 느낀 나는 아이와 함께 아이들 전문 정신과 의원에 진료 예약을 잡고 의사를 만났는데 의사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홈스쿨을 하라고 진단서를 써 주었다. 그때 딸아이는 약물치료와 함께 상담이 필요한 우울증 진단을 받았었다. 그리고 엄마인 나에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울증 진단이 내려졌다.
언제부터 딸은 아팠던 것일까? 초등학교 때 홈스쿨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까? 나는 언제부터 조울증이 시작되었던 것일까? 조울증은 정신분열증인 조현병을 치료할 때 쓰는 약물을 항우울제와 함께 쓴다. 난 나도 모르고 있던 병으로 오랜 세월 고통당하며 그 고통을 이겨내고자 신앙을 선택했고 신앙을 따라 살았으나 사실은 심각한 조울증 증상으로 남몰래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어떨 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상생활조차 잘할 수 없는 날이 많아 나 자신을 정죄할 때가 많았는데 사실은 아팠던 것이었다. 난 딸과 나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할머니 품에 안기듯 시골집 방 안에 누워 가만히 나를 되돌아보았다. 시골집은 나를 감싸 안고 조용히 어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여름 방학 때마다 와서 지냈던 시골집은 도시 생활의 편리함 속에 자랐던 내게 벌레 많고 냄새나고 덥기만 한 곳이었지만 그동안 애써왔던 모든 신념체계가 무너지는 일을 겪는 순간에는 나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 나를 불렀다. 엄마 자궁으로 다시 들어간 것처럼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로 난 홀로 들어갔고 들리는 각종 풀벌레 소리와 싱그러운 풀냄새에 가만히 나를 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