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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관찰자 Nov 08. 2024

안락사가 소원인 아이

자식은 부모의 거울

 

엄마, 나 죽고 싶어... 죽게 해 주면 안 돼? 안락사가 허용되는 나라로 가서 죽는 게 내 소원이야. 그래서 내 장기는 모두 필요한 환자들에게 주고 싶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줘, 제발!

 여기 안락사가 소원인 아이가 있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라는 어느 책의 제목처럼 어릴 때부터 나의 싸나토스 죽음의 에너지를 주로 먹고 자란 아이라서 그런 걸까? 이제는 아이가 죽고 싶다고 토로한다. 죽더래도 그냥 떨어져 죽어버리고 싶지는 않고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에 가서 힘들게 투병하고 있는 정말로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장기를 나눠주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진짜 소원(?)이라고 말한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고 부모를 그대로 투사해서 나타내 보여주는 요물이라더니 부모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죽음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죽음도 다른 이들의 도움과 의미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의 타고난 희생정신조차 어떤 면에서는 부모를 닮아 있었다.


 처음 아이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이가 힘들어서 무심코 하는 말이 아니라 깊은 고민과 생각 끝에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부모 모르게 아이 스스로 키워 온 생각이 이제는 자신의 소원처럼 마음에 뿌리내려 있었다. 죽음에 대한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이가 자라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어느 곳에 있든 아이는 결국 자신의 소원인 죽음을 투영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며 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한두 번도 아니고 자신의 고통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끝에는 주로 안락사 얘기로 이어졌다. 그런 아이에게 그 당시의 나는 어떻게든 살아야 된다고 강하게 혼내며 말하지 못하였다. 아이의 고통에 공감이 되었기에 그저 눈물을 흘리며 듣기만 하였다. 내 아이조차 이런 고통을 겪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엄마 아빠가 널 사랑하잖아... 너도 알잖아... 너 없이는 우린 못 살아... 너는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야"라고 계속 말하긴 했지만 그런 생각이 올라올 때는 그 어떤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조울증 증상을 겪으며 살아왔던 나의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실상은 나 자신조차도 딸아이처럼 그런 '은밀한 소원'을 '무의식적'으로 품고 살아왔었다. 그렇기에 아이의 그런 말들이 나에게도 강하게 전이가 되고 있었고 나도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랑의 말들도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비록 조울증 약을 먹고 있어 어느 정도 감정이 조절이 되고는 있었지만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고통과 상처들, 무기력감, 죽음의 그늘과 유혹은 나도 떨쳐내기 힘들었다. 결국 난 다음과 같이 아이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안락사해서 장기기증이 그렇게 소원이라면 네가 성년이 되었을 때 스스로 준비해서 그렇게 하도록 해! 그런데 지금은 못 해!  네가 그렇게 소원이라면
엄마도 아빠도 말릴 수는 없어. 하지만 지금은 미성년자이니까
엄마 아빠의 보호아래
무조건 살아!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어떻게든 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두고 싶어 의도적으로 한 말이었다.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성년이 될 때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 받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다면?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가도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야.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도록 하지 않을 거야. 지금 우선 아이를 돌보는데 최선을 다할 거야'라고  계속 되뇌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이가 깨어 있을 동안이나 밤에 아이가 잠들기 전에는 아이에게 집중했고 아이가 자는 동안에는 명상과 침묵 기도에 나를 맡기는 시간을 늘려갔다. 나 자신부터 치료가 되어야 했다. 조용한 가운데 나의 깊은 우울감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계속 걸어 내려갔다. 사실 밑으로 이어진 길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몸 구석구석 들러붙어 있었던 아픈 감정들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나는 엄마로서의 역할 연기도, 아내로서의 역할 연기도, 그리고 심지어 신앙인으로서의 역할 연기도 점차 하지 않게 되었다. 연기가 아닌 나를 찾아야 했다. 진정한 생명을 찾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 상담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는 예상했던 대로 지나온 부모의 허물들을 탓하고 있었고 미숙한 상담사는 아이와 엄마와의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했다. 아이는 더 이상 속 깊은 얘기를 엄마와 하지 않으려 했고 마음을 닫으려 했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말이 상담사를 통해 부모에게 알려질까 봐 상담사가 따로 부모 상담을 하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이가 상담조차 받지 않으려 해서 그 상담사와 부모상담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상담을 계속해도 아이는 자살의지는 줄어들지 않아서 나와 상담사는 아이에게 약물 치료를 시작하기를 계속 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아이는 그만두었던 클라리넷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던 터라 손가락이 굳을 수도 있는 약물 부작용을 우려해서 약을 계속 거부하고 있었고 약을 먹더래도 예고 입시가 끝난 다음에 먹겠다고 했다. 그러다 급기야 아이는 자신이 긴급할 때 상담사와 연락이 되지 않으면 다음 상담에서 자기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상담사까지 협박하게 되자 상담사는 이성을 잃고 "그러니까 약을 먹어!" 하고 아이에게 크게 소리까지 치게 되었다. 다음 상담에서 상담사는 아이에게 소리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아이와 나는 더 이상 그 분과의 상담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상담사는 상담센터가 아닌 정신과 의원에 소속된 분이었는데 아이가 정말 긴급하게 상담사랑 통화를 하고 싶어 상담사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아이가 응급 상황임을 난 분명히 알렸음에도 병원 측에선 상담사 개인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었고 상담사가 휴가 중이라 전달도 하지 못한다라고 딱 잘라 말하였다. 할 수 없이 상담사가 돌아오는 대로 꼭 연락을 부탁드린다라는 말을 전하고 상담사의 연락만을 기다렸었다. 그런데 병원 측의 전달은 받았지만 상담사는 휴가에서 돌아와서도 아이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지 않았었다. 정말 응급 상황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어느 날 밤에 자고 있던 나를 깨웠다. 밖에 나가 뛰어내리고 싶다고 했다. 졸음이 번쩍 달아났다. 밖으로 나가려는 아이의 발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아이야, 제발! 엄마를 보아서 참아주면 안 되겠니?" 복도에서 아이의 다리를 붙들고 한동안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 밖을 나가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창문 밖을 한참 동안 응시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아이가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엄마를 깨워 도움을 요청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직은 어려서 부모의 말을 듣는 나이이기도 하고 소동을 부리더라도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당장은 어느 정도 죽음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성년이 된 뒤에도 아이의 진짜 소원(?)이 바뀌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막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에 아이를 어떻게든 고쳐야 했다.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하지만 어떻게 나와 아이는 고통으로 인한 죽음의 그늘과 유혹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갈 수 있을까? 막 시작된 이 긴 터널이 끝날 때까지 어떻게 견디며 살아내야 할까? 끝이 있기나 할까? 이런 일까지 생기자 난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애써왔던 모든 노력과 신념이 아이 일로 다 무너져 내렸고 계속되는 인생의 작은 파도들과 싸우느라 힘을 다 써버려서 이제 맞닥뜨린 큰 파도 앞에서는 더 이상 대응할 힘도 없었다. 죽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고쳐줄 수 없는 무력감과 죽음의 말과 행동에 난 속절없이 휩쓸리고 있었다.

 

PS-위의 모든 일들은 아이가 중학교 검정고시를 치고 예고입시 준비를 하는 기간 동안 겪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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