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자퇴하고 클라리넷을 일 년 가까이 꺼내어 보지도 않다가 다시 시작한 지 한 달여 정도 흐른 뒤 아이가 어느 날 서울 예고 시험을 한번 도전해 보아야겠다고 했다. 이는 마치 이제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달리기 시합에 출전해 보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발언이었다. 중학교 1학년 초겨울 즈음에 시작한 클라리넷을 2학년 초여름에 학교를 그만두기 전까지 6개월 정도 배운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2년 정도 배워야 할 수 있는 과정을 아이가 6개월 만에 습득하는 것을 보고 전공을 고려하긴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랬어도 지방에 있는 예고도 아니고 3개월 정도 남은 시간만으로 서울 예고 시험을 준비하겠다는 것은 보통 고집과 배짱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우울증(혹은 조울증-의사에 따라서 진단이 달랐다)과 대인기피증으로 집에만 있는 아이가 뭐라도 해보겠다는 것이 반가워 클라리넷 선생님과 상담한 후 서울 예고 입시곡이 발표되자마자 악기부터 새로 사 주었다. 서울 예고는 언제부턴가 차별성을 두기 위해 중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B플랫 클라리넷이 아닌 난이도가 높은 대학 입시용 수준의 A클라리넷으로 쓰인 곡을 시험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알토용 리코더, 소프라노 리코더가 있는 것처럼 클라리넷도 여러 개가 있다)
처음에는 아이가 시험만 보아도 정말 잘한 것이니 결과는 상관하지 말자고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말을 했었지만 아이가 곡을 읽어내는 능력과 암보력 그리고 악기 다루는 솜씨가 남다르다는 것을 깨닫곤 만에 하나 합격하게 되면 다시 학교를 다녔으면 좋겠다는 말을 우리 부부는 언제부턴가 아이에게 한 번씩 하게 되었다. 아이는 그 말이 부담이 되었는지 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놓았고 선생님은 아이가 서울예고에 합격할 확률은 별로 없으니 부모님이 학교를 보내고 싶고 또 아이도 학교를 가고 싶으면 가능성이 있는 다른 예고로 바꿔서 지원을 해보자 했다. 아이는 이왕 서울예고 입시곡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눈높이를 낮추더래도 지정곡이 없는 계원예고를 지원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었다. 하지만 지도 선생님은 자신이 출강하고 있는 지방 예고도 자유곡인 데다 서울권 대학의 진학률도 높다고 하여 아이는 선생님이 출강하고 있는 지방 예고로 마음을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다시 한 달 정도 흐르면서 클라리넷 스튜디오 안에서 여러 일들이 일어났다. 몇 년 먼저 배운 선생님의 다른 입시생도 딸아이와 같은 예고를 준비하고 있어 '견제'하고 있던 상황에서 홈스쿨을 하고 있던 딸아이에게는 입시를 치르고자 했던 지방 예고의 콩쿨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딸아이가 좋아하는 반주 선생님의 일정도 지방 예고의 콩쿨 일정과는 맞지 않았는데 마침 계원예고 콩쿨은 모든 조건이 딸아이와 맞아서 결국 아이가 원했던 대로 계원예고를 지원하는 것으로 목표를 다시 바꾸게 되었다. 아이는 계원예고 콩쿨을 비롯한 다소 큰 콩쿨을 입시 전 연습 삼아 여러 번 나가보았으나 예상치 못한 실수가 있어 입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지도 선생님과 반주 선생님과 함께 계속 곡을 다듬어 나가고 실수한 부분을 완벽하게 연주해 내기 위해 마음이 아픈 가운데서도 연습을 하루 두세 시간씩은 집중력 있게 하였다. 곡을 실수 없이 해 내는 날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우리도 몰랐던 아이의 음악성까지 나오게 되어 선생님들과 부모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가 작품보다 연습곡을 더 선호해서 단지 기술적인 부분만 좋은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입시 막바지에는 선생님들은 크게 실수만 없으면 합격할 수 있을 거라 기대도 하였는데 딸아이의 검정고시 환산 점수가 예상보다 낮아 그 확률은 60프로 정도라 했다.
그런데 입시가 다가올수록 아이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시험을 2주일 정도 앞두고 갑자기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했다. 자기는 계원예고를 합격하더래도 학교를 다니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여기까지 음악을 완성한 것만 해도 충분하다고 했다. 결과를 떠나 과정 자체를 격려하고 있었기에 아이가 그만두겠다고 해도 크게 실망은 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아이는 자신의 기량을 보여줬고 아이의 음악에 우리는 감동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난감했다. 산의 정상을 바라보고 갔는데 바로 정상을 눈앞에 두고 내려오겠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십 대 중반인 아이가 시작하고 계획한 일이었기에 스스로가 만족하는 지점에서 멈출 수 있는 자유도 분명 있었지만 길게 보았을 때 아이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아직은 부모로서 결정은 해 줄 수가 있었다. 아이가 아무리 아픈 상태여도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시작한 일에 대한 마무리도 중요함을 꼭 가르쳐 주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만의 하나 합격하더라도 학교는 가지 않아도 좋으니 시험은 일단 보기를 거의 '반강제적'으로 밀어붙였다. 설득이 통하기 어려운 아이의 강하고 고집스러운 기질과 어리고 아픈 상태를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평소에는 워낙 주관이 뚜렷한 아이라 하고 싶은 대로 대부분은 하게 해 주는데 이때는 아이 아빠도 단호했다. 엄마인 나도 아이가 할 수 없으면 아이를 업고서라도 정상을 향해 함께 올라가서 깃발을 꽂고 싶은 심정이었다. 청년 시절 조울증으로 끝까지 해내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도 아쉬운 경험으로 남아있기에 여느 부모들처럼 '아이의 나중을 위해서'라는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아이에게 권했다. 아이는 후퇴할 곳이 없었는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부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험 전 무대를 연습 삼아 보는 콩쿨에서 예상치 못한 실수를 하게 되어 기대했던 입상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면서 불안감이 커진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누구나 그렇듯 불합격이란 결과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시험 치르는 날 아침, 아이는 어떤 결과가 있든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했다. 아빠와 함께 시험을 보러 가는 차 안에서도 아이는 침착했고 좋아하는 음악으로 자신의 마인드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아이는 살짝 미소 지으며 반주 선생님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갔고 반주 선생님은 아이가 처음으로 평소에 하던 대로 실수 없이 무대를 마치고 왔다고 전했다. 며칠 후 나온 결과는 합격이었다. 사실 초등저학년 때 피아노와 플룻을 배웠다고는 하나 클라리넷을 6개월 배우고 1년을 쉬었다가 다시 3개월 동안 준비해서 쉽게 갈 수 있는 학교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이는 상담을 받아도 마음이 무척 아픈 상태였고 완벽한 연주를 위해 부작용을 우려해서 약을 먹지도 않았기에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힘든 상태였다. 더구나 자살사고와 행동까지 있었다. 정상적인 아이들도 입시과제를 완성해 내야 하는 부담감과 입시에 대한 압박감으로 매우 예민해지고 선생님들과 학부모들도 초긴장 상태에서 보통 예고입시를 치르게 된다. 그런데 시험 당일 아이에게 평온한 마음이 임하여 결과를 떠나 아이가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아이를 돕는 보이지 않는 힘이 분명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은혜' 또는 '은총'이라 말한다) 우리 부부는 여러 우여곡절들이 많았지만 아이가 자신이 목표한 바를 넉넉히 해냈을 뿐 아니라 힘든 입시의 여정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던 것에 무엇보다 감사했다. 그리고 아이의 합격은 우리 모두에게 한동안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아이도 스스로를 더욱 뿌듯하게 여기게 되었고 끝까지 할 수 있도록 자기를 붙들어 준 부모의 도움과 지지를 고맙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