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는 어느 날 밤, 야자(야간자율학습) 땡땡이를 치고 미로처럼 복잡한 교정을 빠져나오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바람과 어둠을 피해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로만 듣던 '언덕 위의 하얀 구름집'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바람이 치는 흐린날인데도 샛노란 달이 어둠을 밝히며 구름 사이를 비집고 동실동실 환히 빛나고 있었다.
멀리서 교정을 비추는 불빛 때문에 오히려 한층 어둠이 깊어 보이는 언덕의 암흑 속에서 방향을 잃은 제라는 뚜벅뚜벅 불빛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비를 피해 제집으로 숨었는지 휘영청 노란 달이 사라지고 우울하게 빛을 잃은 달의 꼬리가 어둠 속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막으며 제라는 길인 듯 아닌 듯 기슭을 헤치며 내려왔다. 미로를 헤매듯 20분 아니 30분쯤 지났을까...
멀리서 보이는 먼 가로등을 눈으로 더듬었으나, 방금 고장이 났는지 가로등의 전등은 꺼져 있었다. 캄캄한 어둠보다 더 짙은 자신의 검은 그림자를 우울한 달빛에 발견하고 제라는 자기의 그림자가 아닌 것으로 착각하며 온몸을 떨었다.
아악~~
짧은 비명을 지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나니 자신의 그림자가 맞은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이런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니, 다행인 것도 같고 불행인 것도 같아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언덕 아래로 어슴프레 ‘레이크 호수’가 보였다.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들어 제라의 발걸음은 성큼성큼 빨라졌다.
가시 돋친 장미 울타리로 둘러 쌓인 로즈가든이 나왔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자 누구의 소유인지 알 수 없는 말로만 듣던 어느 부호의 프라이빗 정원이 펼쳐졌다.
우수수 떨어져 내린 화려한 빨간 장미꽃잎들 위를 제라는 사뿐히 지르밟고 지나갔다.
내딛는 발자국마다 달라붙는 빨간 꽃잎들, 다시 걸음을 내딛으면 걸음걸음마다 빗물에 젖은 빨간 꽃잎에서 화려한 태양즙이 흘러 빨갛게 찍혔다.
마당을 한참 지나자, 저택의 문 앞에 다다랐다. 도베르만 종의 대형견 한 마리가 짖지도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소문으로 들었던 ‘칼 지단’이었다. 제라의 얼굴을 보고 반갑다는 듯 일어서며 컹컹 짖자 지단의 목에 걸린 방울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개소리를 듣고 건장한 남자가 나왔다.
“여기 주인이신가요?” 제라가 물었다.
“저는 이 집의 관리인입니다. 누구죠?”
“길을 잃었어요. 저는 구름 언덕에 있는 ‘클라우드 힐’ 학생입니다.”
비에 젖은 제라를 보고 관리인은 집 안으로 안내했다.
사냥꾼이 사냥할 때 가지고 다니는 긴 장총을 허리춤에 차고 있던 관리인은 절대군주를 보호하는 보디가드처럼 지녀야 할 신중성과 절제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거실을 지나 어느 방앞에 멈췄다.
한쪽 공간에 아직 타고 있는 모닥불 앞에 제라를 남겨두고 관리인이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따듯한 모닥불 가까이 다가가서 ‘제라’가 몸을 바짝 말리고 있는 동안, 관리인은 마른 수건과 따듯한 차를 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