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많은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저 그 사람의 사정이라고 생각하고, 다만 그런 사람에게 노출되는 나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람을 내가 어떻게 바꿔야 할 자격도 의무도 없다.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네 어쩌네하는 분석은 심지어 그 사람을 모델로 글을 쓸 때조차 다른 방향으로 갈 것이다. 좀 더 그 사람의 세계를 확장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방향으로.
그러나 일단 내 일상사에서는, 그런 감정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가중되는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가급적 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내 일상을 꾸리는 것이 현명하다.
근데 SNS에서 이런 스트레스를 느낄 때가 있다. 흔히들 SNS의 폐해로 얘기하는 것 중의 하나로 현재 자기의 삶과는 동떨어진 '화려한' 삶이 전시되는 것을 보며 느끼는 우울감...이라고 하는데, 분명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올라오는 사진들이 애써 보여주는 능숙함, 화려함에 담긴 미묘함에 대해서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그보다는 나는 뉴스포털과 SNS의 여과되지 않은 감정에 지속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집중하는 것은 단순 악플이나 다른 가치관의 폭력적인 의견표출보다는, 오히려 나와 같은 가치관과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느끼는 스트레스다. 심지어 이것은 우울감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처음에는 이른바 '사이다'같은 감정으로 그들의 분노 표출 및 필요한 부분을 정확하게 꼬집어 말해주는 것 같은 글들을 접했었고, 정치적으로 충분히 동의함은 물론, 그들이 비판하고 꼬집고자 하는 점이 무언지 다 이해했지만, 어느 순간 아, 질린다. 지친다. 하는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피로감의 원인을 살펴보자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먼저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묘하게 그 사람의 사람을 보고 대하는 태도, 시선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이다.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쓸모없는 인생' '너절한 인생' '지능이 떨어진다' 등등을 운운할 때 느껴지는 타자의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한 시선이 딱히 온당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단발성의 트윗을 보면서 '저런 말은 쓰면 안돼'라는 식으로 생각한 바는 아님을 얘기하고 싶다. 난 어떤 상황에든 때때로 그런 말들을 쓸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난 일단 말은(행위가 아닌) 내뱉되 이후에 자신의 말들을 돌이키는 것이 필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것이 안됨으로써 보여지는 증후들, 즉 이것이 일종의 패턴이 되고 습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 보이면서 문제가 느껴진다. 설사 그 비난하는 대상이 내가 보기에도 매우 그릇된 시선으로 누군가를 취급한다고 해도. 그런 이들의 그릇됨을 꼬집기 위해 어떤 삶은 열등하다, 라는 방식으로 말하는 방법만 존재하진 않을 것 같다. (이 점에서 나도 딱히 자유롭지 않은 것 같긴 하다만...)
다른 하나는 감정의 여과가 거의 되지 않는 말들을 보며 느끼는 피로감이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지와 내용을 계속 지켜가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꾸준히 방법을 찾아내고 실천에 옮기는 것과, 여과되지 않은 감정을 한번도 돌이키지 않고 끝도 없이 배설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들은 이 둘이 같이 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를테면 불의에 참지 않고 분노하기 같은. 분노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힘을 더한다. 근데 트위터 같은 데를 예로 들자면, 난 이런 점에서 별다른 효용이 없다고 느꼈다. 트위터는 공적인 자리에서 자기 의견이 어떤 식으로 전달될지를 감수하고 얘기하는 공간은 또 아닌데, 바로 이 지점때문에 트위터가 자족적인 기능이 있고 그 점이 좋아서 하게 되는 것도 있지만 또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효용성이 없는 부분도 있다. 대체로 요즘의 트위터는 비슷한 경향의 사람들끼리 의견을 공유하는 방향을 편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상대방 의견을 자기가 공격하기 좋은 방향으로 바꿔버리고 허수아비때리기하는 경우 너무 자주 본다. 그리고 '헛소리'하면 대부분 차단한다. 근데 또 이게 틀린 것도 아니긴 하다. 끝도 없이 자의적이고 선택적인 '팩트'에 근거한 반박은 토론 자체를 성립시키지 못하니까, 그러나 이런 거 다 떠나서 트위터는 철저하게 소수적인 매체다. 이런 상황에서 헛소리의 기준이 점점 더 편협해진다), 좋은 얘기에 동조하고 기뻐하는 얘기의 경우는 효과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경우에서의 분노는 무엇을 전달하는 동력이 되지 못한 채, 그냥 자기 정신만 깎아먹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서로의 분노에 호응하며 거의 매일, 매시간같이 분노로 일관된 트위터를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졌다. 옳음을 확신하면서 다른 어떤 부분의 가능성이 닫혀버렸는데, 이게 종교적인 수준에 이를수록 맹목적이고 자기파괴적인 느낌도 든다. 분노로 모든 가능성과 일말의 부조리, 다양한 변수들을 표백하고 순결한 상태를 만들려고 하는 이상한 노력들. 그것이 '도저히 용납불가능한' 것들의 가짓수를 끝도 없이 늘리는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그 분노하는 감정에 몰입하다 못해(이런 경우는 대체로 이런 감정을 함께 공유하는 집단이 있기 마련이다), 이 들끓는 감정을 계속해서 지피고 싶은 것인 양, 사실을 왜곡 또는 날조한 내용을 사실인 양 올리기 시작하고, 거기에 대해 누군가가 정정을 요구하면 모르쇠로 얼렁뚱땅 넘어가서 다음의 분노를 표출하거나, '정말 잘못된 건 따로 있는데 굳이 이런 부차적인 것을 물고 늘어져야 겠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뒤틀린 상황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들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든, 어느 순간 나는 이런 식의 접근 자세는 이제 피하거나 차단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같은 얘기를 하더라도 충분히 다른 태도를 갖고 전달할 수 있는데도, 감정만이 왜 사실을, 또 내 신념을 지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지.
그러나 SNS를 비롯한 온라인에서의 관계에 대해 난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일 수가 없다라는 점은 얘기해야겠다. 좋고 싫고 떠나 거의 불가피했고, 어떤 관계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온라인에서 이루어졌으니까. 나의 성적 지향의 특성상, 그리고 한국에서의 상당수 게이들이 갖고 있는 어떤 사회적 상황들은(이표현도 정확하진 않다), 오프라인에서의 관계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것들이 꽤 많다. 이런 식의 방향성에 대한 판단은 일단 보류하더라도, 친구사이에서의 다양한 오프라인 활동을 자기 관계의 중요 축으로 삼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니 이 조차도 그렇게 원활하지 못하며, 이 네트워크도 상당 부분은 온라인과 얽혀 있다. 새로운 사람들은 대부분 온라인을 통해 유입하게 되므로 온라인의 관계는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온라인을 통한 연결은 전격적인 커밍아웃, 혹은 완전한 은둔을 지향하지 않는 한은(이런 사람들도 건너건너로 종종 볼 수 있다)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온라인을 완전히 배제한다느니, 디지털 자체를 디톡스의 대상으로 삼는 식의 접근 방법은 지금의 나로선 마땅하지가 않다. 오로지 '적절한' 관리만이 해법이 된다. 피할 수도, 중독되지도 않는 균형을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은 나이가 들어 부질없음에 좀더 눈을 뜨고(...) 보다 묵상과 명상에 더 많은 할애를 하고 살 수 있기는 할 것이다. 요즘은 인문학강의도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으로 들으려는 사람이 많고, 심지어 명상을 같이 할 사람을 모집할 때도 온라인을 배제할 수가 없는 세상 아닌가. 완벽하게 차단시킨 상태의 삶? 나는 잘 모르겠다. 죽음이 임박했을 무렵에나 가능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