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규규 Oct 25. 2024

끼와 흉내

게이에게 있어 끼란 대체로 선호되지 않지만 배제될 수 없는 어떤 그 무언가이다. 어떤 게이들이라도 끼는 존재한다. 무의식적으로든 혹은 대놓고 더 과장되게 하든 끼는 '드러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게이에게 있어서 끼란 여성성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헤테로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용인되는 '남성성이 아닌 그 무언가'이다. 작가 이반지하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헤테로의 기준은 사실 꽤 엄격한 편이다. 그 엄격한 기준에 대다수의 남녀가 부합되고 있어 그들이 헤테로 남녀로 공인된다.  그런데 이 '남성성이 아닌 그 무언가'를 무엇이든 성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걸 선호하는 헤테로들은 여성성으로 곧장 이해하고, 심지어 헤테로 사회에서 남성으로서 행세하(려고 노력하)는 데에 익숙한 게이들조차도 이것을 여성성과 혼동하고 있다. 


끼는 은연중 나도 모르게 아무때나 튀어나온다. 의도하지 않게, 그냥- 나 자신도 남성으로서 교육받아온 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남성적인 무언가가 아님을 잘 안다. 그것은 여성들조차 알아차릴 수 있다. 어 저 행동 특이해. 왠지 새침해. 게이들은 그걸 더 잘 알아본다. 물론 퀴어사회에서의 사회성이 다분한 게이들은 익숙해하지만 말이다. 사실 철저한 애들도 있긴 하다. 그런데 그 멋있는 남자애가 잠자리에서 요상한 신음소리를 낼 때 오오... 너는 끼를 참 은밀하게도 숨겼구나, 다행이다-


그러나 게이들은 일반적으로 끼를 좋아하지 않는다. 틴더를 가면 끼순이 사절이라는 말을 뚱뚱한 사람, 퉁퉁한 사람, 중년 만큼이나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끼는 매력포인트가 될 수 없다. 탑이든 바텀이든 끼가 없(어보이)는 남자를 찾는다. 일틱이란 말이 있었는데 요샌 그 말조차도 새삼스럽고 옛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단지 끼에 익숙해질 뿐이다. 일부러 끼있는 애를 찾진 않으며 만나게 되더라도 그건 끼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재치와 남다른 호쾌함이 있어서다. 한마디로 재미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끼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귀한 걸 알아보고 얼른 채가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어렸을 때의 나는 끼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좀더 무감각했고 좀더 전방위적으로 그것들을 풀어놓았으나 왕따를 당한 이후로는 극히 조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흉내라는 말에 관심이 많다. 언제나 흉내내는 데에 많은 시간이나 관심을 쏟았다. 고교시절을 떠올리면 소음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함을 떠올린다. 나는 여기서 단 한 명의 친구도 사귈 수 없었다. 지금도 연락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뭔가 자랑스러워해야 할까. 다만 모두에게 친절했던 한 친구가 예전 쓰던 페이스북에서 아주 가끔 좋아요 표시를 했었지 싶다. 그 시절 왕따를 당한 적은 없지만 왕따를 당했던 국민학교시절보다 더한 고립감을 느꼈던 것 같다. 거기서 도시 남자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볼썽사나운 꼴도 많은데 다른 한편으로 정말 저게 바로 성장한다는 거구나, 라는 느낌을 받은 적도 많다. 생각이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그 생각이 성숙해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그 말들을 조리있게 이어나가는- 남자든 여자든 그런 애들을 많이 봤다. 나는 그걸 흉내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흉내는 늘 실패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내가 뭘 원하는지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이다. 반항을 배운 적이 없어서 무엇이든 다 반대로 하는 식으로 터득하는 이쪽 애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난 그렇게도 못했고- 예전엔 실패에 자존감의 추락을 느꼈으나 지금은 이 반복되는 실패가 곧 나의 정체성임을 알았다. 여전히 나는 은연중 그것을 완전히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뭔가에 철저하려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겪고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나는 이 철저하지 못함을 형상화하고 싶다. 

이전 04화 디지털 디톡스와 퀴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