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규규 Nov 01. 2024

충분의 조건

오늘 빵에 너무 만족했는데, 모처럼 바삭하고도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빵에 대한 즐거움을 느꼈다.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빵이었다. 이 마음은 내가 만드는 빵 중에서 가장 최상의 만족도일 때 드는 생각이다. 글도 이렇겠구나 생각했다. 나는 어떤 빵이나 과자가 좋은지,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싶은지 잘 알고 있다. 어떤 쿠키는 충분한 교감이 없었던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에게도 나눠줄만한다는 걸 충분히 판단하고 기꺼이 나눠줄 수 있었다. 그게 맛없다는 건 당신 입맛이 좋지 않다는 거야(물론 쿠키라는 음식 종류를 선호한다는 전제 아래), 라고 기꺼이 생각할 수도 있고 말이다. 글도 그럴 것이다. 많이 써봐야 알 거다. 이건 정말 사람들과 나눠야 할 글이다, 라는 것에 대해. 



나는 맛있는 빵과 훌륭한 빵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어도 그걸 그대로 본따 나도 그렇게 해보이고야 말겠다라는 생각을 안 한 지 꽤 되었다. 내가 내 빵에 대해 꼭 그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그랬다. 물론 한때는 빵이나 타르트 한번 만들어서 성공하면 와 나 빵에 재능있는거 아니야 소질있는 거 아니야 차리면 맛집되는 거 아니야 나중에 경연대회 나가면 상 타는 거 아니야 같은 생각을 했었다. 글 하나 완성해놓고 이걸로 등단하는 거 아니야라든가 같은 식으로, 자신이 흥미 이상의 무언가 의미를 담고 착수한 어떤 작업의 첫 번째 완성에 대해 갖게 되는 자신감과 기대감, 흥분 같은 것이 있지 않던가. 이런 종류의 감정들은 대체로 내 경험에 대한 고찰보다는 당장의 '보편'으로부터의 기대와 인정과 관련한 내용이 많았던 것 같고, 대체로 그렇게 상상해내는 내용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엔 너무 진부하고 유치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효과는 있지만 거기까지였고 내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과는 거리가 멀다. 



해보니까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게 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몇 년간 꾸준히... 그 과정에서 어떤 게 좋은 것인지를 자기의 범주 안에서 알게 되고, 그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혹은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선이라는 게 생기는 거 같다. 여기서 넘어가면 보다 많은 공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며,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지금의 다른 조건들을 희생해야 하는지도 느낀다. 그럴 생각이 있다면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반드시 기대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빵이라도 마찬가지다. 빵은 사실 정해진 레시피가 있기는 하다. 다만 도구나 기계의 측면에서 업그레이드를 불가피하게 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그러나 그것까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나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내가 만족하는 정도만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는 여건은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의 형편상 넘을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더 좋은 걸 만들려고 하려면 그에 필요한 욕구가 필요한 것 같다. 잘 만들어야겠다라는 욕구 말이다. 


다만 이걸로도 충분하다, 라는 생각이 더 많았기 때문에 빵은 비슷하지만 계속 만들 수 있었다. 난 내게 충분한 빵을 10년 이상 만들어왔다. 물론 이 빵은 내다 팔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물건이 되기엔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게 별로인 걸 알고도 나한테 나쁘지 않았기에 기꺼이 취했고, 정 안 되면 크바스를 담갔다. 가끔 공력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렇게 행하고, 거기서 나은 결과는 볼 수 있었다. 



 충분하다,라는 마음을 계속 지니고 있는 건 중요한 것 같다. 어쩌면 가장 먼저 누려야 할 마음일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결과에 대한 욕구만이 앞서면 충분하다는 생각조차 망각하고 활동의 동력 자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충분한' 어떤 조건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삶을 자기만의 고유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충분함은 자기의 경험에서 터득되는 것이며, 이 기반위에서의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과업에 있어 고유한 첨단을 만든다. '그걸 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같은 식의 시기의 이르고 늦음 같은 것은 보편적인 기준이지만, 자기 안에 충분 조건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경우 시기는 어쩌면 내 스스로가 정하게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건 자기 스스로 행하고 알아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예외는 없다. 


이전 10화 우리 개인의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