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편지는 상대가 받을 것을 목적으로 받을 대상과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하지만 부치지 않은 편지라도 받을 대상과 쓴 목적이 분명하기는 마찬가지다. 편지가 부쳐지지 않는다고 하여 그 편지에 쓰여진 문장이 무용하지 않다. 오히려 대상의 존재가 희미해지리만큼 더 강렬하고 간절하다. 그사람은 그 편지에 거부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부치지 않는, 부칠 수 없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대와 소통을 할 때 다른 생각의 여지를 남겨둔다. 그건 상대의 반응과 의견에 대한 고려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이 지금 쓰고 있는 바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삶을 이어나가는-나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글과 같다.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문장에는 적당히 빈틈이 있고, 넉넉한 품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언제나 삶에 대해 무지를 알든 모르든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부치지 않은 편지는 죽은 자의 유언과 어딘가 닮아 있다. 상대에게 차마 할 수 없었던 얘기에 담겨지는 감정의 강도는, 더 이상 남아있을 것이 없는 삶 앞에서 자신의 남은 감정을 모두 쏟아붓는 유언의 형태를 띄게 된다. 도달할 수 없게 된 '당신'은 죽음이다. 죽음 앞에서 나는 모든 것을 고백한다. 모든 것을 낱낱하게, 간절하게, 정교하게 발설한다. 여유를 조금도 두지 않기에 죽음을 눈 앞에 둔 자의 언어는 유달리 형형하고 애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