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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그 시절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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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목영 Oct 14. 2024

마음 비우기

  늦은 나이에 글쓰기 반에 등록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모든 일의 분수는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 만사분이정(萬事分已定)을 넓게 이해한다면 필연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진단과 인생을 깊이 성찰(省察)하는 길이다. 부단히 자신을 고양(高揚)하는 수련의 길이며 오염을 씻는 자기 정화(淨化)의 길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성찰, 수련, 정화와는 또 다른 새로운 감동과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것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때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주의의 만연으로 사람들의 정서는 황폐하였고 급격한 산업사회의 비대화와 복잡성으로 경쟁과 갈등이 팽배했다. 이때에 마음을 비운다가 사회적 화두였고 이 화두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참 운치로운 말이다. 이 말은 일체의 고뇌, 갈등, 증오, 분노, 근심 등의 잡념을 끊어 차라리 무념무상(無念無想) 허심(虛心)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다는 말이다. 이 시기에 나는 바쁘게 사업도 사회활동도 했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했고 이해관계가 얽힌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나에게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절실했다. 잡념으로 심신의 피로감과 세월을 허송했다는 상실감에 빠져있었고 잡념이 빼앗아간 시간은 벌충할 방법이 없어 답답했다. 잡념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했으나 단기성으로 끝나고 별 효험이 없었다. 마음을 통째로 비운다는 것은 수도승의 업이라 나와 같은 장삼이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그릇에 담긴 물건을 비우듯 하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쏟아버리면 또 무언가 채워졌다. 잡념이란 무지막지하게 내몰려해도 소용이 없었다. 실험실에서 플라스크 안의 물질을 치환(置換)하듯 시심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많은 시행착오 끝에 치환제로 한시를 선택했는데 그 선택은 탁월했고 적확했다. 참으로 먼 길을 돌아 돌아왔다. 


한자는 자체가 표의문자로 거의 다가 일자다의(一字多意)다. 한시에서만큼 압축성이 강한 시는 없을 것이다. 자간(字間)과 행간(行間)에 암유, 상징, 뉘앙스 등으로 언어 외에 함축을 가능케 하여 불과 수십 자의 글 속에 인간세계를 압축 수용해 놓고 있는 것이 한시다. 한시는 잡념을 제거했고 심신의 안정과 맑은 정신으로 회복하는 정심제(定心劑)로 나에게 긴요했고 효험도 특별했다. 


  글쓰기는 내가 은퇴 후에 시작했고 이것은 나에게 한시와는 또 다른 감탄과 감동을 자아내게 했다. 퇴고지(推敲紙)를 들면 잡념이 마치 화면 바뀌듯이 순간 사라지니 이보다 더 강력한 치환제가 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쓰기는 나로만 살던 좁고도 짧은 인생이 더불어 사는 길고도 폭넓은 삶으로 확충되는 감개와도 만나게 했으니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삶의 느낌을 글로 적으면 글에서 어느덧 잊고 있던 옛 모습으로 와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니 글쓰기의 정화력(淨化力)은 무한하다. 봄나무 발정(發情)하듯 글을 쓰고 싶은 열정에 매일매일이 새롭다. 새롭다는 것이 내 희망의 원천이다. 한 가슴 활짝 열어젖힌 채 속에 숨어 있는 애련지정(愛憐之情)을 찾아내어 한없이 글을 쓰고 싶다. 인생의 깊은 무게가 실린 여운 있는 긴 글도 쓰고 싶다.

인생을 올바르게 사람으로 사는 공부는 글을 쓰거나 글을 짓는 일보다 더함이 없으며 그것은 그때마다 은미(隱微)한 깊은 곳에 내재한 자신과 만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은 그 자신이라고 하나 보다. 


  글쓰기 반에서 이래저래 혜택만 받았고 갚을 길이 없어 막막하다.

이 또한 만사분이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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