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약이 무효라던데...
취미생활은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있어 상당한 도움을 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취미를 영위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맨몸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달리기 같은 취미조차 그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몇 킬로미터를 뛸 때마다 한 번씩 갈아줘야 하는 러닝화부터 땀 흡수가 잘 되는 조깅복, 러닝 코치 기능이 있는 앱과 연동되는 스마트워치 등. 지름의 유혹은 어떤 취미에도 존재한다. 빠져들게 되면 패가망신의 지름길로 접어든다는 남자들의 3대 취미인 자동차, 카메라, 오디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음악을 취미로 삼는 이들에게도 장비병은 존재하고, 이 난치병은 취미를 영위하는 한 언제까지나 따라다니게 된다.
까혼을 기반으로 한 어쿠스틱 퍼커션을 연주하던 내가 샘플링 패드라고 부르는 전자 드럼 패드에 관심이 가게 된 계기는 그 성능보다는 오히려 어쿠스틱 퍼커션의 수음(受音: 마이크 등으로 소리를 받아내는 것) 문제 때문이었다. 까혼과 핸드 심벌, 윈드 차임을 세트로 구성해서 사용하다 보니 제대로 모든 악기의 소리를 마이크에 담아내려면 뒤쪽 까혼 사운드 홀에 한 개, 앞쪽 심벌과 윈드 차임에 한 개 혹은 두 개. 최소 2개 이상의 마이크를 세팅해야 한다. 그건 마이크, 스탠드, 라인 등의 준비물이 2배로 많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채널도 2개 이상을 할당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버스킹 앰프에서의 채널 숫자도 넉넉하지 않은 데다 심벌과 윈드 차임의 마이킹은 깔끔하게 잘 받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규모가 작은 무대에서는 부속 악기들의 마이크는 생략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큰 공연장이 아닌 이상 심벌 등의 금속제 소리는 날 것으로 그냥 나가도 어지간히 전달이 되기는 하지만 정작 연주자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이 문제는 언제나 미처 다 못한 숙제처럼 찜찜하게 남아있는 고민거리였다.
그러던 중, 샘플링 패드라는 물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샘플링 패드는 고무로 된 몇 개의 패드가 붙어있고 이 패드를 스틱으로 때려서 소리를 내는 사각형의 전자악기인데 가상 악기의 음원이나 외부 샘플링 사운드를 입력해서 재생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여기에 봉고나 까혼, 드럼 스네어, 킥 등의 사운드는 물론 심벌이나 윈드 차임의 사운드까지 입력하는 대로 사용이 가능했다. 신기한 물건이었다.
신천지를 발견한 항해사의 심정처럼 두근거리며 쇼핑 사이트를 검색했지만 이내 모니터에 표시된 금액을 보고 급격하게 피가 식었다. TV속 록 밴드가 사용하던 R 사의 S 모델은 100만 원이 훌쩍 넘어갔다. 9개의 패드로 구성된 고급 모델이었지만 가격 또한 그에 걸맞은 금액이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할인에 쿠폰을 모두 긁어모아 봐도 자릿수가 바뀌진 않았다. 에이, 집어치우자. 지금도 잘만 쓰고 있는데 채널 하나 줄여보겠다고 그 돈을 들여 뭐 하러 장비를 바꾸나.
하지만 장비 하나에 꽂히게 되면 그 생각에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미천한 실력을 올리려면 부단한 연습과 일정한 양의 시간을 투자하여야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뭔가 저 악기, 혹은 장비를 구입하면 단숨에 내 연주의 퀄리티가 늘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게임의 현질(현금을 들여 아이템을 사서 성능을 높이는 행위)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처음엔 원래 목적대로 하나의 라인에서 모든 소리가 출력이 가능한 장점만을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투자에 대한 명분이 서질 않았다. 몇 주 동안 판매 사이트의 스펙 설명과 유튜브의 사용기 등을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면서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그려보았다. 킥 페달을 연결할 수 있네? 그러면 지금 손으로 연주하는 것보다 더 다양한 사운드를 낼 수 있겠는걸? 그래, 지금 구성에서는 쇳소리가 모자랐어, 하이햇 소리가 들어가면 곡 표현이 더 풍성해질 거야. 그렇게 장비의 필요성에 대한 합리화는 머릿속에서 점점 더 구체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애처로울 정도의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가격의 심리적 장벽은 견고했다. 악기에 저 정도의 금액을 한 번에 때려 넣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100만 원이라는 금액은 어떤 합리화나 구매 욕구로도 넘을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다음 단계는 그보다 저가의 대체품을 찾는 일이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A 사의 모델을 찾을 수 있었다. 원래 마음에 두었던 R 사의 S 모델과 비슷한 스펙에 8개의 패드로 구성된 모델이지만 가격은 인터넷 최저가 48만 원. 절반에 못 미치는 가격이었다. 물론 가격과 성능은 정비례하는 것이 이 바닥 상식이니 품질 면에서 무언가 아쉬운 부분이 있을 테지만 최소한 지원한다고 공언하는 기능 면에서는 엇비슷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극한의 가성비 추구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고행과도 같은 길을 요구하는 법. 또 얼마간의 웹서핑 끝에 대체 모델을 찾아냈다. 같은 A 사의 모델이지만 이 녀석은 패드가 8개가 아닌 4개. 기능을 왕창 줄인 실속형 모델이었다. 인터넷 최저가 28만 원.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패드 두 개로는 기존 카혼의 베이스 소리와 스네어 소리를 내고 위쪽 패드 2개 중 하나는 심벌, 하나는 윈드차임에 할당하자. 거기에 더해 킥드럼 페달 연결이 가능하네? 완벽해. 굿. 퍼펙트. 그래, 너로 정했다.
바로 결재 버튼을 누르.... 지 않고 검색창을 닫았다. 신품 구매라니, 그런 사치를 부릴 수는 없다. 악기 거래의 세계는 중고 사이트가 활발하다. 악기라는 물건 자체가 취향을 많이 타는 물건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가난한 음악가가 많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다행히도 상당히 많은 악기들이 중고로 거래되고 있다.
중고 사이트 몇 군데를 잠복하는 날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사이트마다 키워드 알람을 걸고 틈날 때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마침내 목표로 했던 물건이 떴다. 가격은 15만 원. 사진으로 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곧바로 구매를 하고 며칠 후 악기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사이 적당한 드럼 스틱과 스탠드를 사느라 얼마간의 추가 지출을 했지만 처음 생각한 모델의 구매금액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지출에 뿌듯해하며 악기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새로 산 악기는 꽤나 괜찮은 소리를 내어주었지만 핸드 퍼커션을 치던 손으로 스틱 연주를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익숙하지 않은 악기에 허덕이며 몇 번의 합주와 한두 번의 버스킹을 뛰고 나니 아쉬운 점이 느껴졌다. 전자드럼 소리가 나는 샘플링 패드는 까혼의 대용품이 아니었다. 그저 패드 수가 모자란 전자드럼일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사실 악기의 문제라기보다는 새로운 악기에 대한 훈련과 적응시간의 부족이 더 근본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현질을 한다고 똥손이 금손이 되지는 않을 테니. 하지만 훈련과 적응은 꽤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또 무엇보다 지루하다. 그에 반해 밴드에서 새로운 악기로 성과를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그에 따른 내 해결책은 패드 수가 많은 상위 모델의 구입이었다.
다시 한번 사이트 잠복과 검색의 나날들을 거쳐 중고 사이트에서 신품가 48만 원의 A 사 상위모델을 30만 원에 구입했고, 다행히 기존 4 패드짜리 제품도 구입가와 같은 15만 원에 처분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스탠드와 킥 페달, 하이햇 페달 등의 추가 지출이 있었지만 8 패드 짜리 제품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실제 드럼과 비슷한 형태의 구성으로 세팅을 할 수 있게 되었기에 드럼의 교재나 교본 영상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좋은 점이었다. 악기에 맞춰 억지로 편곡을 하지 않아도 샘플 영상을 기반으로 연습을 할 수 있다는 점은 상당한 장점이었고, 음색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물론 곡마다 세팅을 바꿀 때 로딩 시간이 길게 걸린다거나 패드를 칠 때 가끔씩 반응이 느린 부분이 있었지만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사소한 문제였을 것이다. 분명 처음에는.
몇 달이 지나니 그 사소했던 문제가 신발 속에 들어간 작은 돌멩이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찌어찌 참아 볼 수는 있지만 영 신경이 거슬리는 그런 문제. 그리고 그 문제가 단지 자금을 투자하기만 하면 해결될 것 같은 종류의 문제라면 그때는 지름신의 유혹을 참아내기가 상당히 어려워진다. 결국 얼마간의 잠복과 기다림의 시간을 또다시 거쳐 내 손에는 제일 처음 노렸던 R 사의 S 모델 샘플링 패드가 쥐어졌다. 중고가 60 만원에 스탠드까지 포함된 만족스러운 가격. 30 만원에 구매했던 A 사의 제품은 28 만원에 처분할 수 있었다.
역시 상위모델은 돈 값을 했다. 확연히 좋아진 음색과 빠른 로딩시간 등, 대부분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막상 구매하고 나니 미처 알지 못했던 단점이 있기는 했다. ‘하이햇 컨트롤러’라는 기능이 지원되지 않았다. 이 기능이 없으면 하이햇의 오픈-클로즈 컨트롤이 불가능했다. 같은 R 사의 다른 동급 모델에는 있는 기능이었지만 그 모델에는 외부의 음원을 넣을 수 없고 내장된 소리만을 써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고려대상에서 제외했었다.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어찌어찌 궁리한 끝에 듀얼 트리거(한 단말에서 두 개의 소리를 받아내는 기능)를 사용해서 비슷하게나마 해당 기능을 재현할 수 있었기에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어차피 더 이상의 선택지도 없었기에 그렇게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향상된 장비로 인한 만족도를 즐기면서 새 악기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새로운 팀에서 예전에 시도해 보지 못했던 사운드를 만들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웹서핑을 즐기던 중 새 뉴스를 보게 되었다. R 사에서 그 모델의 상위 모델이 출시된다는 소식이었다. 기존 모델에 없던 ‘하이햇 컨트롤러’가 장착된 것은 물론이고, 연결할 수 있는 드럼 패드의 수도 늘어나고 온갖 기능이 향상된 그야말로 신제품이었다.
아쉬운 점이 해결된 좋은 악기가 출시되었으니 기뻐해야 마땅할 테지만 인터넷 쇼핑창에 표시된 악기의 금액을 보고는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최저가 200만 원. 이건 뭐 어느 정도 상향된 금액이 아니었다. 기존 모델의 2배라니... 심지어 이번에는 중고 매물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신규 출시 제품이니 중고 매물이 있을 리도 없었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나오는 물건은 대부분 단순 개봉품, 정가의 90~95%를 넘는 시세였다. 기술의 발전이 원망스러웠다. 여보세요, 나 그냥 여기서 만족하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그렇게 나의 장비 에스컬레이션은 반강제로 잠시의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름신이 다시 찾아올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신제품의 중고 가격이 접근 가능한 심리적 마지노선에 다가오게 되는 날, 나의 장비병은 잠시 잊었던 오랜 친구처럼 다시 찾아와 내 어깨를 두드릴 것이다.
P.S) 글 서두에 장비병을 불치병이 아닌 난치병이라고 지칭한 이유는 매우 치료가 어려운 병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특효약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약의 이름은 ‘통장 잔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