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보고 싶었어?”
“레이몬드?”
“갑작스레 와서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 좀 도와줘야겠어”
“... 설마”
필립은 부정하듯 입을 벌렸다
“그 지위는 네가 가져도 돼, 아니 여기 있는 전부를 다 가져, 그러니까 날 죽여줘”
“드디어 찾은 모양이군”
“넌 할 수 있지? 본래라면 극 안에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이니까, 그러니 어서 날 죽여”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 백작은 세상 최고로 행복한 얼굴이었다.
“사랑한다면, 죽을 수도 있어?”
“물론”
“정말 네가 그녀를 사랑한다면 이쯤에서 그만둬야지”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그래, 그녀가 없으면”
“그럼 죽든가”
“그러니 날 죽여줘”
그 말을 듣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넌 못 죽어, 네가 튀어 나간 만큼 쌓인 네 의무를 이행해”
“그녀가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변명일 뿐이야, 애초에 그녀가 왜 여길 떠났는지 몰라? 아니 내가 알려줄까?”
이런 대화라면 지긋지긋했다. 집착남주와 도망여주,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예컨대 이런 일인 줄 알았다면, 처음 만났을 때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이제 그만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레이몬드 백작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백만 번 말해도 모자랄 것이다.
“네 집착이 부담스러워서 그녀는 떠난 거야”
“닥쳐,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네가 대단해 보였어, 레이몬드, 널 존경했다고, 근데 가까이서 보니 넌 그저 겁쟁이일 뿐이었지, 지금도 봐, 상처받는 게, 등 돌리는 게 두려워서 혼자만 졸래졸래 쫓고 있잖아!, 네가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그건 스토킹이야, 그러니 이젠 그만해 친구, 넌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어.”
순간 목에 칼날이 닿았다 레이몬드 백작, 그가 험상궂은 낯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검을 들이민 채로 말이다.
“어디, 고운 목에 흠집 내볼까? 같잖은 소리 집어치워, 그따위 충고 안 해도 충분히 알아먹으니까 말이야. 아니다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다. 그 거지 같은 엑스트라 생활로 말이야”
“말조심해, 그분들은 각자 열심히 일하고 있는 분들이야”
“아~그래? 그럼 뭐 병신 같은 것들만 먹고 병신같이 매일 일하는 엑스트라들이 데체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삶을 사는데?! 보나 마나 아주 큰 중죄를 지었을....”
퍽!
순간을 참지 못한 필립이 레이몬드 백작의 뺨을 쳤다.
“일국의 백작을 치다니 제법인걸 필립, 이 정도면 과실치사로 봐도 되지?”
“맘대로 해”
“넌 사형을 당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나도. 그럼 넌 엑스트 세계로 돌아갈 거고, 난 그녀에게로 가게 되겠지. 뭐 이러나저러나 넌 아쉬울 게 없겠어”
그때였다 시간선의 균형이 무너지고, 세계는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갔다. 가짜 이그리트가 시간을 또 한 번 과거로 되돌린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간 사람들은 오직 극의 남주 레이몬드 백작과 화이트 샤를로트에게만 해당이 되었다,
그리고 연회의 첫 만남에서 레이몬드 백작과 화이트 샤를로트는 다시 한번 재회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당신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 몰라요”
화이트 샤를로트가 대답했다.
“화이트 샤를로트!”
레이몬드 백작이 화이트 샤를로트를 껴안기 직전, 화이트 샤를로트가 난간 귀에 세워진 꽃 병으로 레이몬드 백작의 머리를 내리친 것은 순식삭에 일어난 일이었다.
꽃병 안에 담긴 물은 이른바 어떠한 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만능이라 불리는 쿨링 정화 수였다.
그제야 레이몬드 백작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이제까지의 정의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을 에 위화감을 가졌으며, 그 순간의 일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레이몬드 백작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주 강력한 흑마법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화이트 샤를로트는 처음 레이몬드 백작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를 사랑해 머지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레이몬드 백작의 집착은 광기에 가까워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화이트 샤를로트는 그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그리트와 계약을 맺고 세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극의 여주인공이 빠지게 되면서 대타가 필요해지자, 그녀는 세계 밖의 작가, 미샤 화이트를 극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정작 그 자리를 원했던 것은 그녀였으므로, 그러나 단번에 동일인물이 아니란 걸 알아챈 레이몬드 백작은 미샤 화이트를 죽임으로써 화이트 샤를로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그럼에도 화이트 샤를로트는 자신의 목숨 일부를 맞봐꿔서라도 미샤 화이트를 여러 번 살려냈다. 그 뒤 영생을 살 수 있다는 가짜 이그리트의 말에 속아, 열매를 먹고 괴수가 되어 레이몬드 백작에게 죽임을 당했다.
레이몬드 백작은 화이트 샤를로트를 찾기 위해 온 서적을 뒤졌다. 그 뒤 이그리트를 찾아내어 그러 던 중 엑스트라 세계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필립을 만나 동료로 영입한다. 그 후 세계 밖으로 나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