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대신한 나의 말
노인이 되지 못한 엄마를 생각한다. 아가씨 때부터 고수해온 단발머리 스타일, 듬성듬성 흰머리가 있으나 백발은 아닌 검은 머리카락, 탄력을 잃었지만 깊지 않은 미간과 팔자 주름을 가진 엄마. 잠을 자듯 누워 염을 받는 엄마는 언제고 일어나 언제 왔느냐고, 밥은 먹었냐고 물어올 것만 같다.
엄마를 선산에 묻고 집으로 돌아온 날, 서둘러 엄마를 잊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우리 삼남매는 안방 화장실에 쌓인 묵은 엄마의 옷가지들을 꺼냈다. 엄마는 처녀 시절부터 입었던 옷을 이사 다닐 때마다 짊어지고 다니셨다. 다시 꺼내 입지도 않을 옷을 버리지도 주지도 못한 채 안방 화장실에 가득 쌓아 놓고 사셨다. 아빠는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포대에 담긴 엄마의 옷을 바닷가 자갈밭에 태우셨다. 엄마의 옷은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시커먼 연기로 변했다. 먼 바다에서 불어온 바닷바람이 엄마의 세월을 하늘 위로 높게 높게 휘몰아쳐 올렸다.
이제 내게 남은 엄마의 옷은 약혼식 한복과 임부복이 전부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그러니까 죽음의 징조가 전혀 없던 몇 달 전 엄마는 당신의 약혼식 한복과 임부복을 내게 주셨다. 엄마는 느닷없이 한복을 건네며 ‘나중에 너 입어’라고 해맑게 웃어보였다. 나는 오래되고 요즘 세대와 맞지 않은 꽃분홍색을 보자마자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이걸 내가 왜 입어!’라고 반문했던 기억이 난다.
공단소재의 꽃분홍색 한복은 그 분홍 색상이 너무도 고왔다. 행사를 맞아 태극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영부인이 선택해 입었을 법한 색상이었다. 고전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한복은 옆에 두고 엄마는 임부복도 건네셨다. 임부복은 나일론 소재로, 보라색 바탕에 잔 꽃무늬가 프린트된 맞춤옷이었다. 168센티미터인 내 키에도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감, 목을 감싼 둘레감이 절묘하게 내 몸과 맞춘 듯 떨어지는 첫 단추, 뼈만 도드라진 마른 내 손목 둘레에 여유도 없이 소매가 딱 맞아 떨어졌다. 당시 첫 아이를 임신한 후 맞춘 임부복으로, 엄마도 나와 같은 44반 사이즈의 몸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가늘고 긴 손목, 길고 여린 목을 가진 엄마의 처녀 시절 몸매가 저절로 상상이 됐다.
엄마는 내처 장롱에서 사진첩을 꺼내 약혼식 사진과 언니를 임신했던 시절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두 장의 사진 속에서 엄마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분홍 한복을 입은 사진 속 엄마는 새하얀 분칠에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앳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 앞에 펼쳐질 고생길을 미처 알지 못한 눈빛을 가진 스물셋의 여자였다. 엄마는 결혼 일 년 후 언니를 갖고 세 살 터울인 나를 낳았다. 두 번째 사진 속 엄마는 신축성도 없는 맞춤으로 지어 입은 나일론 임부복을 입고 불룩한 배를 그러안고 있었다. 깡마른 몸매의 엄마는 풍만한 배만큼 행복에 부풀었을 당시를 증명하듯 활짝 웃고 있었다.
엄마는 서른셋에 결혼해 삼 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않는 나를 걱정하셨다. 벽을 치듯 견해를 고수하는 고집스러운 둘째 딸의 심지 있는 목소리에 때론 의지하는 엄마였지만, ‘여자의 숙명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을 늘 하셨다. 아이 둘을 낳고 다섯 살 터울이 나는 늦둥이를 본 언니와 달리 애초에 아이를 가질 생각도 하지 않고 결혼한 나를 엄마는 염려하셨다. 엄마는 당신의 옷과 사진을 보고 내가 아이를 갖는 것에 관해 희망을 품기를 바라셨다.
이제 엄마가 가고 주인 없는 옷을 보며 엄마를 생각한다. 가늘고 힘없는 손목으로 겨울 생인 나를 낳고 기저귀를 빨았을 엄마. 해산한 지 두 주일 만에 밭 언덕에 짚으로 만든 너비 80미터, 높이 2미터의 건장(건조장)에 나가 김을 부은 발장에 손수 대나무 꼬챙이를 찔러 넣었을 가늘고 긴 손가락들. 엄마없이 배가 고파 울다 잠든 내 곁에 지친 몸으로 들어와 잠에 빠져들었을 엄마의 모습들을 상상해본다.
엄마는 내게 고생스러웠던 그때의 일들을 자주 꺼내셨다. 지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빛나도록 행복했었다고 말이다. 아이를 낳는 일은 ‘희생으로 빚은 빛나는 행복 알갱이’라고 하셨다. 행복은 그렇게 조금씩 만들어 쌓아가는 거라고 하셨다. 누가 선뜻 용돈을 건네듯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운 좋게 거저 생기는 복권 같은 것도 아니라며 아이 갖기를 거드셨다.
엄마가 가고 나는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아이를 가졌다. 아기를 갖고 비로소 나도 엄마가 됐다. 그러나 임신에 대한 기쁨은 한 달을 넘어서자 괴로움으로 돌변했다. 입덧이라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폭풍이 불어대는 바다 한가운데에 난파된 배를 탄 기분이었다. 조금만 걸음을 떼도 구역질이 나왔고,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없어 요리해볼 엄두도 내질 못했다. 변기를 붙들고 ‘살려줘’라며 우는 나를 남편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지켜봤다. 입덧은 비싼 한우 투 뿔 고기도, 장어로도 잠잠해지지 않았다. 하루종일 굶은 채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려 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다녔다. 그나마 입에 맞았던 음식점은 남한산성 초가집추어탕과 둔촌동 신라샤브집이었다. 한 달 외식비로 백만 원이 넘게 나올 정도였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남편은 날로 살쪄갔고 나는 마른 몸에 아기집만 부풀어 올라왔다.
그런 와중에 신기하게도 입덧을 잠재워준 것은 엄마의 묵은 김장김치였다. 김치냉장고 제일 아래칸에 넣어둔 생애 마지막 엄마의 김치는 폭풍우처럼 몰려오던 입덧을 잠재워주었다. 물에만 흰밥 위에 김장김치를 얹어 먹으면 입덧은 슬픔을 다독이듯 잠잠해졌다. 구역질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남겨준 김장김치를 아끼고 또 아껴먹었다. 엄마는 그렇게 김장김치로 내게로 다시 왔다. 입덧을 잠재울 방도를 찾은 나는 엄마의 임부복을 입고서 엄마의 김장김치를 찢어 먹는 퍼포먼스를 남편에게 해보이며 웃음을 유발했다.
심한 입덧을 겪고 서른일곱의 나이에 첫 아이를 낳은 후 나는 다시, 노인이 되지 못한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를 보며 나도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리워서 엄마가 됐다고, 엄마가 돼보니 또 엄마가 그립다고, 도돌이표로 치고 올라오는 기분과 다시 마주한다. 아이를 안아 올려 온 가슴으로 안아본다. 엄마도 나를 그러안고 엄마라는 이름을 삼켰을 그 순간을 상상해본다. 엄마없이 엄마를 마주하듯 엄마도 엄마가 된 후 엄마를 알았을 나날을 그려본다. 뭉근하게 엄마가 내게 다시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