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의 노력은 물감을 준비하는 과정
대학교 1학년 2.6의 학점을 받았다. 노력을 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입학 후 놀기만 했기에 갱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군대를 다녀와서 통계학과로 진로를 정하고 본격적인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복학을 하고 나니 '복학생' 타이틀을 가진 늙은이가 되었다. (당시엔 '엠티에 놀러간 복학생'들의 사진 같은 것들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놀 친구도 없는 새학기가 되자 하지 않던 공부를 시작하고, 게으르던 패턴을 바꿔보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에서 똑같은 삶을 살던 주인공이 180도 바뀐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게임에 몰두하고, 누군가는 운동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누군가는 연애, 누군가는 독서, 각자 자기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몰두하는 23살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2.6이었던 학점을 4.2라는 학점으로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등수와 난생 처음 받아보는 장학금. 이 순간을 이상하리 만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지금껏 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뤄지는 기적을 보면서,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갈증이 일어났고 삶은 더욱 확장되었다.
나는 성장과 자기계발, 새로운 경험의 매력에 빠졌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즐기기만 했던 1학년을 청산한 체 각자의 미래를 위해, 각자의 즐거움을 위해 생산적이면서 짜릿한 일들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동기들 또한 학년이 지날 수록 여가 시간보다는 자기계발을, 술이나 게임보다는 펜을 찾기 시작했다. 학술회, 동아리, 대외활동, 학생회, 공모전, 자격증, 학점관리 등 또래인 친구들은 대학생활 요소들 중 하나, 둘 씩 골라 미래를 위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들 대학생활을 보냈다.
4.0/4.5의 준수한 학점, OPIC IH, 공모전 수상 1회, 외국계 기업 인턴경험 1회, 전공 자격증 2개로 꽤 괜찮은 스펙을 갖고 있었고, 나는 나름 내 자신이 이공계에선 꽤 괜찮은 인재라고 생각했다. (문과의 취업 문턱과 스펙을 쌓는 고생과 수고스러움은 너무 높아서 비교 대상으로 하지 않겠다.)
다행히 생산적인 시간을 보낸 덕에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는 않을 스펙이었지만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서류 탈락은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지난 날들의 부정은 여기서 시작된다. 나름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괜찮지도 않고 별 볼일 없는 삶이었다. 방학에 고시원 생활을 하며 얻어낸 토익 점수도, 남들이 쉴 때 아침 잠을 깨며 받은 계절학기 학점도, 저녁에 술 마시러 가는 동기를 뒤로하고 열의를 다해 참여했던 학회도, 스터디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지난 날 동안,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다. 나의 부족함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어떤 것들을 보완해야 할 지 생각해보니, 기업 입장에선 나를 뽑기엔 어느 것 하나 아쉬운 점이 있었을 거라고 느꼈다. 그들이 원했던 건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였다. 우리 회사에 꼭 입사해야 할 색깔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수십 개의 기업에 지원해 서류 합격과 탈락, 면접 경험을 반복하면서 몇 가지 깨닫게 되었다.
즉 다시 말하자면 나의 전체적인 역량 자체는 준수했지만,
1. 직무에 맞춘 스펙
2. 산업에 맞춘 스펙
3. 기업에 맞춘 스펙
중 한 가지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쌓아온 스펙이 없던 것이 되는가? 그건 절대 아니다. 난 돌아보니 대학생활에 내가 쌓아온 것들이 ‘물감’이라고 생각되었다. 덜 노력한 사람이라면 적은 수의 물감을 갖고 있는 것이고, 대학 생활 동안 열심히 달려온 사람이라면 많은 수의 물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핵심은 기업들이 모든 색깔의 물감을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A라는 회사는 빨강색과 주황색 2가지 색깔을 가진 지원자를 원하고, B라는 회사는 7가지 무지개 색을 가진 지원자를 원한다. 하물며 선명한 한 가지 색깔만 원하는 기업도 있고, 흐릿한 10 가지 색깔을 원하는 기업도 있다.
예를 들자면 삼성전자에서 원했던 인재는 뭐든지 다 잘하는 인재가 아닌, 내적동기가 분명하고 자기계발과 성과가 1순위인 인재를 필요로 한다. 거기에 대의적인 명분을 가진. 그 가치를 면접관들이 납득하는 스토리를 가진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반면에 기업은행은 고객과의 소통이 원활하고 대인관계가 좋으며, 주어진 업무를 실수 없이 처리하는 꼼꼼함을 가진 사람을 선발하고자 한다.
많은 취준생들이 지난 노력들을 물거품처럼 생각하곤 한다. 그 생각은 틀렸다. 지난 날의 노력들은 내가 좋아하는 물감을 준비해 놓는 과정이다. 내가 어떤 물감을 가지고 있는지 고민하고, 내가 원하는 기업이 어떤 색깔을 원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 후 부족한 색깔은 취준을 하면서 채워나가면 되는 것이다. 혹여나 대학 생활을 하면서 이런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둔 현명한 대학생들에겐 졸업과 함께 원하는 기업에 취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수능이나 입시 상황에 밝아지는 것처럼, 취준생의 경험치를 쌓을수록 눈이 밝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자.
모든 취준생이 자존감의 상실을 겪고, 모든 이들은 간절함으로 면접관을 마주한다. 이른 새벽 정갈한 옷을 차려 입고, 거울을 수 차례보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 그들 중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니 상처받고 자책하며 돌아가는 당신의 지하철 한 자리에 자책과 상처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색을 지니며 산다. 때로 할리우드의 누군가처럼 화려하지 않더라도, 우리만의 색깔을 스스로 과소평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스스로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적 있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어차피 취업은 1승이다. 당신은 현재 자신과 맞는 기업을 찾고 있는 과정일 뿐이며, 또 그 기업은 당신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는 것뿐이다. 단지 아직 마주치지 못했을 뿐이다.
유투브를 보다 보면 취업 준비 과정을 연애로 비유하는 글 들이 많은데 상당히 공감된다. 우리 모두가 취업을 준비하며 당연히 간절하고 급하겠지만, 단지 ‘일자리’가 급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우리는 전략적으로, 또 자기만의 브랜드와 색깔을 만들어가며 준비해야 한다. 당신은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색칠을 안 했을 뿐이다.
내가 원하는 회사가 원하는 색이 무엇인지 고민하자.
우리는 그 물감을 준비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