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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화이트데이의 약속

by 햇살 드는 방 Mar 14. 2025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포장마차에서 여러 썸남썸녀 원샷하게 만들었던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 속 명대사, 기억하시죠? 초롱초롱한 눈으로 정우성을 바라보며 찰랑찰랑 채워진 소주잔을 거침없이 비워내던 당돌한 손예진의 도발이 사랑스러웠죠. 사실 그 영화가 나오기 몇 년 전, 저도 그와 비슷한 대사를 들어본( 혹은 읊어본 )적이 있습니다.


"화이트데이에 만날 사람 없으면 나랑 영화 보는 거다?"

영화를 보자? 데이트하자는 거죠. 만날 사람 없으면 데이트 하자? 네, 맞습니다. 작업이죠. 요즘 말로는 '썸'이라고 하나요? 어느 밸런타인데이의 밤, 친구들이랑 한 잔 하고 들어가던 길에 저를 집에 바래다주던 한 친구에게 들은 말이었습니다. 아니다, 내가 한 말이었던가? 들은 말이었는지, 한 말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건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겠죠. 무려 25년 전 일이니까요.


그때의 저는 매일 대차게 놀며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는 중이었습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영 열차를 탄 남자친구 덕분에 이별 열차까지 급행으로 타고 말았거든요. 오래 사귀어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난생처음 겪어보는 헤어짐에 술 먹고 울기, 한밤중에 친구 불러내 한탄하기,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쓸쓸히 한숨짓기 등 어디서 본 건 다 해보던 중이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런 저의 진상 짓을 다 받아주던 착한 친구들이 제 옆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요. 친했던 동기들마저 하나, 둘 군대로, 어학연수로 떠나던 쓸쓸했던 그 시기에 입대도 미루고는 아니고 그냥 심심해서  저와 놀아준 두 녀석들. 아무튼 우리 삼총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 술도 먹고, 밥도 먹고 또 술도 먹었습니다.

20대 초반, 파릇파릇한 청춘이었네요.


그렇게 셋이서 신촌 골목 이곳저곳을 누비며 재미있게 놀고 나면 한 친구가 꼭 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집이 같은 방향이었기 때문이죠. 제 집은 서울시 XX구, 친구 집은 경기도 OO시. 같은 방향 맞죠? 그런 걸로 해요.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말수는 적지만 술은 말술로 마시고, 키는 대문짝만 한데 십자수와 비즈 공예에 능한, 서툴지만 섬세하고 얼핏 까칠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귀여운 뭐 그런 친구였답니다. 같이 학교 다니는 2년 동안 여자 친구 사귀는 것 본 적 없고, 화내거나 큰소리 내는 것 본 적 없고, 동아리 회장을 맡아 조용히 맡은 일만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본, 써놓고 보니 뭐 약간 소 같기도 하고 돌쇠 같기도 한 그런 친구였네요. 사실 이 친구랑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은 별로 없었어요. 동아리 일 하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조용히 째려본 적은 있었죠. 20대 시절 파워 ENFP의 삶을 살던 저는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였고, 모임에서 가장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테이블에서 제일 신나게 떠들며 노는 핵인싸였어요. 반면에 그 친구는 주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이야기를 조용히 웃으며 듣고 있는 그런 타입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대화다운 대화를 할 기회가 없었죠.


그랬던 우리가 가까워진 건 헤어진 전 남친 덕분이었습니다. 끈 떨어진 고무신 된 동기 위로해 준다고 모인 친구 중에 한 명이 그 친구였거든요. 여럿이 모여 있을 땐 말수가 적어 몰랐는데 또 다른 친구와 셋이서 만나 놀아보니 의외로 조곤조곤 말을 잘하더라고요. 셋이서 학교 앞 포장마차에 앉아 오돌뼈에 소주 한 잔 하며 지난날에 대한 시답잖은 농담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류의 비밀 아닌 비밀 이야기, 동아리에 올인한다고 말아먹은 학점은 어떻게 만회해야 할까 등에 대해 떠들곤 했습니다. 같은 노래 동아리에서 2년 동안 부대끼며 크고 작은 공연과 행사를 겪어왔으니 돌아볼 추억도, 안주거리 삼을 에피소드도 많고 많았죠.

“이제 곧 3학년이 될 텐데, 슬슬 공부도 하고 취업도 준비해야겠지? 아, 너희들은 군대부터 다녀와야겠구나….. 그런데 내일은 뭐 할래? 내일은 도서관이라도 갈까? 우리도 곧 3학년인데. 이제 슬슬….”

매일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반복하면서도 뭐가 좋다고 그 겨울방학 내내 셋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 웃고, 떠들었네요. 그러다 보니 실연의 아픔은 무슨, 그냥 재미있었습니다.


셋이 놀다 헤어지면 집이 같은 방향인 그 친구가 어김없이 저를 바래다주었습니다. 어떤 날은 버스 제일 뒷자리에 앉아, 어떤 날은 2호선 손잡이를 잡고 덜컹거리며 깜깜한 창밖 풍경을 나란히 바라보며 또 한참을 떠들었죠. 사실 그때 둘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얘가 원래 이렇게 재미있는 애였나? 원래 이렇게 다정했나?‘

‘뭐지?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따뜻하게 말하네?’

문득문득 이런 생각을 하며 내 옆에 앉은 그 아이를 조금 새롭게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찾아온 밸런타인데이. 애인도 없이 오늘도 셋이서 이게 뭐냐며 넋두리를 하다 들어온 날. 방금 바래다주고 간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 잘 들어갔지?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쉬어. 인사치레 같은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다 갑자기 약속이 정해졌습니다. 한 달 뒤, 화이트데이에도 둘 다 만나는 사람이 없으면 학교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로. 영화를? 둘이서?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이 슬쩍 고개를 들었지만, 단칼에 거절하기엔 아까운 제안이었죠. 당시 유감스럽게도 금사빠적 기질이 있었던 저였지만 한 달 안에 새로운 남자 친구를 만들 만큼 연애에 열정적인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생각해 보니 그사이 소개팅이 들어왔었는데 뜨뜻 미지근한 반응으로 물 건너 보낸 것도 같고요. 어쨌든 애석하게도 둘 다 애인은 만들지 못한 채 화이트데이 이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여보세요? 내일 영화 보러 갈 수 있어? “

“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가야지, 그럼”

“그래. 그럼 2시에 OO극장 앞에서 봐.”

아, 뭐죠. 왜 갑자기 어색한 거죠? 손바닥에 자꾸만 식은땀이 배어 나와 축축했던 건 기분 탓이었겠죠.


다음 날, 텅텅 빈 영화관에서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둘이 같이 본 영화는 무려 <그린마일>이었습니다. 네, 스티브 킹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그 <그린마일> 맞습니다. 러닝타임 188분에 빛나는, 교도관과 사형수들이 대거 등장하는, 톰 행크스가 만성 요도염에 시달리고, 전기의자 처형 장면이 여러 번 반복되는….. 그런 범죄, 드라마, 판타지물이었죠. 첫 데이트에 볼 영화로 안성맞춤이죠?


그날 3시간이 넘는 대작을 함께 보며 피어난 전우애 덕분일까요? 친구와 저는 그 시간 이후로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습니다. 25년 전 화이트데이는 친구와 저의 첫 데이트 기념일이 되었죠. 그리고 둘은 그 후로도 여러 번의 화이트데이를 함께 보내게 됩니다. 그때의 전 상상이나 했을까요? 25년 전 화이트데이를 함께 보내기로 한 그 가벼운 약속이 제 평생의 반려인을 선택하는 첫 단추가 될 거라는 것을요.



브런치 글 이미지 2

하리보 젤리와 킨더 초콜릿. 오늘 아침, 우리 집 식탁 위에는 달달이 세 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아빠가 두고 가신 화이트데이 선물에 딸들도 신이 났었죠. 뭐가 제일 맛있을까, 어떤 게 내 취향일까 진지하게 젤리맛을 고르던 녀석들은 알고 있을까요? 오늘이 본인들의 운명이 결정된 지 25년째 되는 날이라는 것을요. 거창하게 부러 챙기는 기념일은 아니지만 매년 화이트데이가 되면 어김없이 생각나곤 합니다. 극장 앞에 어색하게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의 모습이, 텅 빈 영화관 뒤로 영사기 돌아가던 소리가, 영화가 끝나고 함께 걸었던 학교 후문 길의 풍경이… 어느새 시간은 흘러 풋풋했던 20대 친구 둘은 번갈아 흰머리를 염색하고, 해마다 손 잡고 건강검진을 다니는 반 백 살 준비단이 되었네요. 건배사로 새삼스레 청바지( 청춘은 바로 지금 )를 외치진 않지만, 두 친구의 마음속엔 아직도 그때의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찬란했던 청춘의 한때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든든한 인생의 밑천이 되나 봅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연인에서 부부로 그리고 부모로, 나와 함께 크고 있는 내 친구에게 오늘이 가기 전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준비성 부족한 저는 오늘도 미리 챙겨놓은 사탕도 젤리도 없이 빈 손이네요. 그래도 이렇게 브런치에 글로 기록하는 것으로나마 우리의 스물 다섯번째 화이트데이를 추억하고 축하해 봅니다. 25년 전, 화이트데이의 약속을 지켜준 내 친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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