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에서 첫 이사를 준비하다
< 사진 출처 : 다음(Daum) 달력 >
"손 없는 날이요?"
화들짝 놀란 목소리에 의아해했을 사장님. 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신다.
"네. 손 없는 날이어서 이사비가 더 비쌉니다."
"아. 손 없는 날이 언제인가요."
"26일, 27일, 28일입니다."
"아, 그렇군요. 다른 이사업체도 마찬가지인가요."
다른 곳은 아닐 수도 있다는 황당한 생각에 당연한 걸 묻고 있다.
"네, 그렇습니다. 어디든 마찬가지입니다. 가격이 비싸시면 다른 날짜로 옮길 수는 없나요."
"네, 그때밖에 안 되거든요."
손 없는 날. 예전에 뉴스에서 얼핏 들어본 것 같다. 손 없는 날에 이사를 한다고. 전혀 생각지 못한 이사업체 사장님 말씀에 황당해하며 서둘러 검색해 본다. '손 없는 날'.
손 없는 날은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사람에게 해코지한다는 악귀 또는 악신이 돌아다니지 않아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길한 날을 의미한다. 손(損)은 날수에 따라 동서남북 4방위로 다니면서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사람에게 해코지한다는 악귀 또는 악신을 뜻한다.
출처 : 다음 나무위키
아. 신구간이구나. 육지에도 신구간이 있다니. 전혀 생각지 못했다. 놀랍고 황당무계하다. 무슨 나라가 온갖 귀신과 미신으로 얼룩져 있단 말인가. 검색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비단 26, 27, 28일뿐만이 아니라 2월 6일, 7일, 16일, 17일도 포함된다. 귀신이 한 달에 여러 날 돌아다니지 않나 보다. 특별히 2월에. 아니다 매달이구나. 아이코. 그럼 매달 손 없는 날이 있으며 그때를 찾아서 이사를 한단 말인가. 나무위키에 따르면 손 없는 날은 '길한 날'을 의미한다. 정말 당황스럽다. 지금 살고 있는 집주인과의 계약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이사 날짜를 이틀 미루게 된 것인데 그날이 바로 손 없는 날이라니.
제주에는 신구간(新舊間) 문화가 있다.
신구간은 제주에서 이사나 집수리 등 평소에 꺼리는 여러 가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간. 대한(大寒) 후 5일에서 입춘(立春) 전 3일 사이의 일주일을 말한다. 이때에는 여러 신들이 임기를 마치고 천상에 올라가고 새로운 신들이 내려오는 교대 기간이므로 지상에 신령이 없어 평소에 금기되었던 일을 해도 아무 탈이 없다고 한다.
출처 : 다음 나무위키
집 안에 화장실 신(神), 부엌 신, 현관 신 등 여러 신들이 머물고 있다고 한다. 그 많은 신들이 집안과 인간사를 돌보고 임무를 마친 후 제주를 떠나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업무 보고를 올리는데 그 기간을 '신구간'이라 말한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보증금을 깎는 월세나 전세 대신 1년 치 세를 한 번에 내는 사글세(연세)가 주된 주택거래 계약이다. 집을 구하려고 알아보다 보면 보통 신구간에 맞춰 계약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전세에 익숙한 육지사람들이 제주에서 집을 구할 때 의아해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바다. 육지(손 없는 날)와는 다르게 일 년에 일주일 정도의 기간, 보통 1월이나 2월 사이에 신구간이 잡히기 마련. 당연히 이 기간에는 이사비용도 비싸진다.
그러나. 이는 필자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이름부터 제주의 탄생과 함께 대(代)를 이어오고 있지만 아쉽게도 관련이 없다. 이유는 할머니부터 이어온 믿음의 세대 즉 크리스천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 앞에 제주의 1만 8천 신들이 대수냐. 다 헛것이다. 그래서 결혼할 때도, 집을 구하고 이사할 때도, 아기를 낳을 때도, 아이 이름을 지을 때도. 그 어느 것도 제주의 토속신앙(문화)을 따른 것이 없다. 그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정해왔던 바다.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손 없는 날'. 원하지도 않았지만 육지의 귀신들이 없는 길한 날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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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 이사 온 지도 딱 2년이 되었다. 즉 고향을 떠나온 지 3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제3화 '안녕, 우리 집' 글 참고) 급히 육지로 이사 오게 되어 아이들 학교 개학 전에 계약 기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결국 공실인 신축 아파트로 이사 왔었다. 외지에서 어찌 지내나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육지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네 즐거워하며 지낸 지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개발된 동네라 신축 아파트에 동네도 깔끔하고 길이 평탄하여 모든 환경이 새것으로 반짝거렸지만. 아이들 학교 문제로 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육지로 전학 온 지 2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사실 제주에 있었다면 학교 생활 중에 전학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사를 다른 동네로 간다 한들, 학교는 버스로 혹은 차로 라이딩 하면 되니깐. 하지만 육지에서는 초등학생 때 이사하고 전학 가는 일은 다반사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전학'을 위해 이사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이사를 위해 여러 집을 보러 다니다 보니 하나같이 집주인들은 학군지로 이사 가기 위해 집을 세 놓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집 계약기간과 아이들 학년을 봤을 때는 지금이 적기다. 이제 육지 생활과 이 동네에 적응되나 싶었는데 또 다른 새 출발을 준비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이미 이사를 마음먹었던지라 지난해 6월부터 동네와 집을 아름아름 알아보고 있었다. 아이들 학교도 근처에 있으면서 살기에도 괜찮고 안전하고. 무엇보다도 남편 직장이 가까우면서 생활권이 갖춰진 동네를 찾았다. 3군데 동네를 돌아다녔을까. 사실 육지 동네를 잘 모르기 때문에 동네마다 검색해 보고 책을 뒤적거리며 동네 부동산마다 '이 동네는 어떤가요?'라고 묻기를 여러 번. 결국 우리 기준에서 합당한 동네를 찾았고, 그 동네의 부동산을 통해 집을 이곳저곳 보러 다녔다. 집을 다섯 채 정도 보았을까. 가격이나 위치나 적합한 아파트를 찾게 되어 계약하게 되었다. 집을 알아보는 기간은 꽤나 길었으나 일을 처리하는 데는 정작 3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잘 처리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남편은 여느 때와 같이 늘 회사에 바빠 새롭게 이사를 가도 동네의 생활권을 누리는 것은 단 지하철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아이들 학교 스케줄, 학원 동선 그리고 마트 등을 파악해야 한다. 반면 아이들은. 아이들은 눈물로써 제주를 떠나고 이제 새 학교와 새 친구들에 적응됐다 싶었는데, 이사 간다는 말에 '또 이사 가요.'라고 했지만. 육지 생활 1년 차부터 계속해왔던 말이라 이제 이사를 코앞에 두고 친구들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친구들과 이별파티를 열기로 했다.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음식을 먹고 노는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중요한 건 친구들과 일대일로 사진을 찍어주는 것. 이전 제주를 떠날 때도 동네, 학교 친구들을 초대해서 이별파티를 했었다. 그리고 즉석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친구들에게 나눠줬었다. 사랑이와 기쁨이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사진 하단에 날짜와 이름을 써서.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쿠팡에서 즉석카메라 필름을 주문했다. 어김없이 아이들 친구들과 사진을 찍어줘야지. 그래도 이번 이별은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되는, 같은 육지여서 다행인가. 사랑이와 기쁨이에게
"대학 가서 만나자고 말해. 동네가 다르니 중, 고등학교 때는 만나기 어려워도 대학교에서는 만날 수 있어."
라고 '대학', 과 '친구'를 강조해서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시간은 금방이다, 아이들아.
주말의 이별파티뿐만이 아니다. 이사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거실 달력에는 해야 할 것과 체크할 사항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책장 정리하기 (책 나눔 및 조카들에게 보내기)
냉장고 비우기 및 청소하기
학교 가서 교과서 받아오기
Btv 해지하기
워시타워, 식기세척기 해체하기
학원 정리 및 학원비 마무리 짓기
귀중품 및 자잘한 물건들 챙겨놓기
이사 가서 가전제품 다시 조립하기
정수기 설치
학원 레테(레벨테스트) 보고 정하기
학교 전입 신청하기
이제 곧 개학이므로 아이들 가방, 실내화 점검하기
동네 한 바퀴 돌아보며 파악하기
동네 N카페 가입하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집을 정리하는 일이다.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과 부동산 사장은 우리 집을 둘러보고서는 늘 말씀하신다. '집이 왜 이렇게 깔끔해요.', '아들 키우는 집 맞아요.' 하며 칭찬을 늘어놓으신다. 그렇게 깔끔해 보이는 우리 집이건만. 다용도실과 드레스룸, 신발장과 싱크대 문을 하나씩 열고 보니 버릴 물건과 정리할 물건이 태산이다. 버리고 또 버리고.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 이사 가기 전에 이 집을 정리하고 닦고 쓸기에 바쁘다. 많은 체크리스트 중에서 막상 한 번에 해결될 것 같지만, 여러 업체(및 학원)에 전화를 해야 하고 늘 바쁜 업체와 전화통화를 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게다가 요즘 ARS 상담원 인원 대 감축으로서 모든 것을 AI로 처리하기 때문에 절차가 더 까다롭고 복잡해졌다. 어찌어찌하여 신청 접수는 마무리가 됐다. 이제 하루에 하나씩 업체를 마중하고 처리하면 된다. 그리고는 이제 이사만 하면 끝이다. 이사 후 정리는 나중에 생각하자.
겨울의 끝자락에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간다. 집도 한 번밖에 보지 못한 터라 이삿짐도 어찌 정리해야 하나 까마득하지만, 손이 빠른 자신을 믿으며 하루 만에 짐 정리가 깔끔하게 될 거라 믿는다. 아이들 학교생활과 학원도 어찌 알아봐야 하나 소심한 I지만, 이곳에서의 2년 육지 생활을 바탕으로 잠잠히 머물지만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곳에서도 거실 한가운데에 기나긴 탁자가 자리 잡게 될 것이고 소파는 엉뚱하게도 창문 앞을 차지하게 되겠지. 그리고 눈앞에 한강이 보이던 이곳과는 달리 거기에서는 서울의 유명한 타워가 눈앞에 보이겠지.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음에 감사하며 따스한 봄날 같이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비싸게 이사비용을 지불하며 '손 없는 날'이사하게 된 우리는, 새 집으로 이사 가자마자 '000 교회'라는 명패를 현관문 앞에 정성스럽게 붙일 것이다. 귀신이 없다는 길한 날에 하나님께서 더 강력하게 보호해 주실 것을 믿으며.
이제 여기도, 안녕.
한강 윤슬, 너도 안녕.
따스한 봄날처럼
설레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