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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다.

- 느린 걸음으로 -

by 산들바람

지지부진 (遲遲不進)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럴 때가 있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어렸을 때 학교 운동장 한구석에 있던 시소 seesaw는 꼭 반대편에 누군가 있어야 하고, 내가 오르고 싶으면 저쪽이 가라앉아야 한다. 그래서 혼자 탈 수 없는 놀이기구였다.

그네는 혼자서도 흔들거리면서 타고, 미끄럼도 혼자 내려올 수 있었는데, 시소는 혼자 앉아봐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니, 갑자기 어릴 적 시소 seesaw가 떠올랐다.

무게 중심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소가 마음에도 있는 것 같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있고 싶은 곳과 있어야 하는 곳 사이에서,

더 나아가고 싶은 욕망과 현실에서 적당히 안주하는 자족 사이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무게 중심 시소는 심하게 한쪽으로 기울고 있는 때가 있다.


지금 내가 기울고 있는 시소는 해야 하는 일, 그리고 있어야 하는 곳, 그리고 현실에서의 적당한 자족.

이쪽이 너무 무거워 그냥 모래 바닥에 처박혀 있는 상황으로 그려진다.

해야 하는 일이며, 있어야 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시소의 이쪽에 가라앉아 있어도 괜찮다.

그런데,

마음은 이렇게 계속 한쪽으로 기울어있는 시소가 재미없다고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내가 이게 뭔가?'

'지금 여기 매일 와야 하는 곳 말고는 가야 할 곳이 어디라도 가고 싶은 곳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도 좋지만, 더 의미를 찾아가는 인생의 여정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혼자 타는 시소는 만약 오르고 싶으면, 나의 몸을 들어 올리기만 해도 된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가해서 모래 운동장에 처박힌 시소를 올라가게 한다는 마음으로 나를 가볍게 해야 한다.

나를 잔뜩 무겁게 만드는 현실의 무게감과 나 스스로 나에게 지우는 중압감에 눌려있는 지금의 나를 본다.

시소처럼 한쪽으로 무겁게 내리 앉은 나를 돌아보니 이유는 있었다.


해야 하는 일, 있어야 하는 곳, 현실에 대한 자족. 그것이 무거움의 이유 전부는 아니었다.

지금의 내 마음 상황의 이유는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끌림'이 일어나지 않는다.


'끌림!' '끌림의 법칙'의 한경아 작가는 인간의 끌림을 뇌과학적으로 설명했다. 짝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그 사람의 '외모' 때문이 아니고, 그 사람의 '행동'이라는 것이며, 그 행동은 그 사람의 기질과 호르몬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르몬 때문이다?! 내 몸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에 따라서 내 행동이 좌우된다.


고통스러운 운명의 낭만주의적 개인을 특징짓는 핵심 정서는 '멜랑콜리 Melancholie'다. 낭만주의가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이유다. 멜랑콜리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수천 년 동안 '어두운'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특징짓는 단어였다. '멜랑콜리'는 그리스어로 '검은색'을 뜻하는 '멜라니아 melania'와 '담즙'을 뜻하는 '콜레 chole'가 합쳐진 단어다. '검은 담즙'이 많은 사람은 음울하고 무기력하다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각했다. -창조적 시선(김정운 저자) -


호르몬이 어찌 되었든 2024년을 살아온다고, 나 스스로가 애를 썼나 보다. 멜랑콜리로 축 가라앉았다.

벌써 작년이 되었다. 2024년 12월 24일 겨울방학식으로 학교의 학사일정을 모두 마치고 긴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이제 지금의 작용 법칙과는 반작용의 법칙으로 나를 움직여야 하는데, 여전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생겨났다.

길게 긴장하고 일상을 살아와서인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허리통증으로 몸을 움직이기도 고통스러운 날이 되었고, 추워진 날씨에도 몸은 자꾸 움츠려 들었다.


요즘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들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충격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이 쌓여서 지금의 나를 설명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에게 스스로 묻는다.

'끌림'이 샘솟는 일상을 위해 조금씩 마음을 일으켜 세워야 하지 않겠어?

서서히 다른 곳에서, 다른 일상으로 나를 놓아두고, 그 가운데 있는 나를 봐야 하는 것은 아니야?

모르겠다.

아무튼 요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멜랑콜리로 지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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