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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지 않은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by 바달


흐르는 시간에 손을 담그다


글을 쓰기 시작한 본질적인 이유는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

나를 너무 아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슬픔과

이별에 대한 두려움과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는 강박은

어릴 적부터 알아온 고질병이었다.


소중히 여기는 인형은 해지기라도 할까

집 밖에 들고나가본 적이 없고,


어릴 적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며

쉬이 끊어지는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껴

친구에게 쉬이 마음을 열지 않았고,


연애를 시작할 때에도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호감이 생기질 않았다.



상처받기 두려워 요리조리 피해 다닌 끝에


두 살 때부터 가지고 놀던 인형은

아직도 멀쩡히 내 방에 가지고 있고,


철벽 같은 내 곁에도 기어이 다가와준 사람들에게는

깊은 고마움을 느낄 줄 알고,


대학생이 되자마자 나보다 순수한 사랑꾼을 만난 덕에

또래보다 비교적 이르게 결혼한,


조금은 독특하지만 그럭저럭 무사히 큰 어른이 되었다.



다만 영원하지 않은 것,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나의 약점으로

때로는 발작 버튼처럼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


나는 상실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루게릭병으로

몸의 기능을 하나씩 잃어가던 할머니를 지켜보는 동안에도 그랬고


손목을 다쳐

좋아하던 것과 취미로 삼았던 것들을 포기하고

익숙했던 생활방식을 모조리 갈아엎어야 했던 순간에도 그랬다.



그 모든 순간에 내가 두려워한 것은

상실 그 자체가 아니라

상실을 다룰 줄 모르는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상실은

불확실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서운 가능성이었다.


이런 것까지 잃을 수 있구나

이런 것마저 빼앗길 수 있구나.


언제나 내게 닥쳐온 상실보다

앞으로 다가올지 모를 상실이

더 두려웠다.



살아오며 습득한 유일한 방어기제는

가능한 한 덜 사랑하기였다.


빼앗길 수 있는 것들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것들


물건이든 일이든 사람이든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들을 눈앞에 두고도

사랑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며 살아온 것 같다.



그럼, 질문.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단언컨대, 절대로 불가능하다.


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회적 존재로 태어나는 인간의 비애라 할 수 있겠다.



그래도 나름

사랑하기에 ‘안전한’ 것들을 찾아가며

그럭저럭 무난히 살아왔다.


친구들이랑 노는, 아니

(어릴 적 나의 무식한 표현을 감히 빌려 오자면)

허비하는 시간보다

아주 오래 존재할 것들에 마음을 쏟았다.


과학 잡지를 찾아 읽고, 천체 사진으로 방을 꾸미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국어나 사회 같은 과목보다

수학이나 물리를 더 좋아했던 이유가


이 나라, 아니, 인류 문명이 사라진다 해도

자연의 법칙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아서였다고 하면

믿어주시려나.


하지만 진심으로

언어와 사회를 공부할 때면

영원하지 않은 것에 에너지를 쏟는 기분이 들어

몹시 힘들었다.


불확실한 인간관계보다

결코 나를 미워하지 않을 나의 강아지에게

더 깊은 애착을 쏟았고,


마지막 장을 넘긴 뒤에도

언제든 다시 돌아가 머물 수 있는 세계,

소설과 영화 같은 이야기들을

마음껏 사랑하며 살았다.



나의 약점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살아있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더는 견딜 수 없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손목을 쓸 수 없었던 시간 동안

온몸이 굳어버리셨던 나의 할머니를 다시 떠올렸고


피아노 치는 취미를 내려놓아야 했을 때에는

언젠가 삶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오리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더 이상 삶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순간

삶은 순수한 고통이 된다.


무엇도 사랑할 수 없는 삶이라면,

아니, 삶 그 자체조차도 사랑할 수 없다면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남아있나.



사랑이라는 이름의 용기


이토록 나약한 겁쟁이의 틈을

예리하게 파고든 것은

다름 아닌 ‘인상주의’였다.


르네상스가 균형을, 낭만주의가 갈망을, 사실주의가 현실을 포착했다면,

인상주의는 영원 속에 부서지는 찰나를 담아냈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그림이다.


모네의 캔버스 위엔 선명한 윤곽도, 견고한 색채도 없다.

시시각각 변모하는 빛의 잔영에 온 정신을 쏟은 탓이다.


하여 그의 그림은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보다, 그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빛과 공기의 질감을 그려낸 듯하다.


그에게 본질이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닌 ‘언제’ 그리느냐에 있었다.

동일한 대상을 같은 자리에서, 오직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한 그의 연작들이 이를 증명한다.


이토록 덧없이 변화하는 빛의 변주를 그는 참으로 사랑했던 모양이다.



변하지 않는 것을 쫓는 행위는 본능에 가깝다.

예측 가능성을 곧 생존 확률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생리적 본능과,

체온이나 혈당 등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몸에 새기고 태어난 존재의 숙명인 것이다.


그렇기에 불확실성은

죽음의 공포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인감은 견고한 것을 좋아한다.

확실한 결론, 정확한 해답, 명확한 진리.

모두 영원에 대한 감각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다.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 것에 매혹된다.

단단한 보석, 유구한 우정,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또한,

죽음이라는 소멸 너머까지 자신의 존재를 남겨두려는

처절한 본능에서 기인한다.



인상주의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른다.

흐르는 빛과 시간에 기꺼이 몸을 내맡기며,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노라 역설한다.


나는 인상주의를 용기라고 생각한다.



부유하는 삶


시시각각 변모하는 것들에 온 정신을 쏟으며 살았던 모네는

진정으로 행복했을까.


때때로 발 디딜 곳 없이 공중에 부유(浮遊)하는 기분은 아니었을까.


분명 존재하나 때론 존재하지 않는 듯하고,

살아 있으나 곧 스러져갈 듯한 기분을

그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떠안았을까.



인간은 대체로 견고한 것에 안주하려 한다.

하지만 견고함이 주는 안온함에 기대어 살아갈 때,

우리는 어느덧 고집불통 노인네로 변해간다.



서구 철학이 가시적인 현상 너머에 불변의 본질이 존재한다 역설할 때,

인상주의는 감히 말했다.


우리는 본질을 볼 수 없으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오직 망막에 맺히는 찰나의 감각뿐이라고.



명멸하는 우리의 존재를 부유(浮遊)하는 잔상 속에 온전히 담아내는 것.

나는 그것이 분명 용기였다고 생각한다.



다시, 사라지는 것들


소설 <물의 유희>를 쓰는 동안 깨달았다.


설이는 하루하루 빼앗겨 가는 그 모든 것들을

사무치게 사랑했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향유하는 이들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생의 모든 조각을 사랑했을 것이다.


끝내 빼앗겨야만 하는 운명 앞에서

그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참으로 두렵고도 처절한 일이었으리라.



그 결연한 마음 앞에서,

엄습하는 질병을, 다가올 죽음을

어찌 패배라 일컬을 수 있을까.


그 고귀한 용기를,

그 지독한 사랑을,

감히 무엇이 덮을 수 있단 말인가.



내 안에는 용기가 없었건만,

설이는 무서운 속도로 저만치 앞서갔다.


나는 그런 설이를 참 많이도 아꼈다.


처음에는 나의 가장 연약한 조각들을 꺼내놓고

그것을 보듬기가 못내 버거웠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설이가 보여준 그 용기를 간절히 닮고 싶어졌다.



나는 설이에게 <물의 유희(Jeux d'eau)>라는 곡을 선물했다.


명확한 화성과 견고한 종지부 대신,

끊임없이 일렁이는 선율로 생의 찰나를 포착하는 음악.

허망하게 부서져 내리는 것들을 기꺼이 껴안는 이 곡을

설이의 시작이자 마지막으로 삼고 싶었다.


설이가 보여준 용기가

덧없는 빛을 붙드는 인상주의의 미학과

닮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나는 내가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지를 안다.


남편이 퇴근길에 이따금 사다 주는,

머지않아 시들어버릴 꽃 한 송이에는 그토록 환하게 기뻐하면서도,


정작 생의 본질적인 것들 앞에서는

늘 비겁하게 머뭇거렸다.


이제야 돌이켜보니

내가 건네받은 것은 한낱 꽃다발이 아니라,

찰나를 사랑하는 용기를 흉내 내볼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꽃잎처럼 피어있는 나의 삶을 살아내야 할 차례다.


브런치북 공모전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나의 <물의 유희>를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할지 한동안 고민에 잠겼었다.


남편은 내게 다정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마이너한 주제와, 생각의 흐름에 따른 전개.

다수의 흥미를 끌어당기기엔 어려운 작품인 것 같다고.


그리하여 이제 내게 남은 선택지는

이쯤에서 내려놓기,

혹은 진부하고도 고단한 투고의 여정뿐인 듯하다.



그 어떤 길을 택하든 간에

어젯밤 결단했다.


죽음조차 설이의 삶을 패배로 단정 지을 수 없었거늘,

고작 몇 차례의 낙방에 휘둘려

설이를 나의 패배로 삼아서는 안 되겠다고.



그리고 계속해서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휘몰아치는 현실로부터 도망쳐

잠시잠깐 글 속에 머무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가장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주어진 생의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있는 것,

그리고 그 살아있음의 무게를 감히 점수 매기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앞서 떠난 모든 이들에 대한,

죽음의 문턱에서도 기어이 '사랑'을 발음했던 그 용기에 대한

가장 깊은 경외임을 설이가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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