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출한 세 식구는 일주일에 한두 번 온라인으로 장을 본다. 장바구니에 과일 하나쯤은 꼭 넣어두는데 요새는 딸기 한 팩씩 골라 넣는다. 딸기의 품질에 비례하는 무거운 가격에 잠시 고민을 하지만 이 시기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제철 과일이라 용기를 내본다. 어린 시절 주말 저녁 티브이 드라마를 보면 으리으리한 2층 집의 넓은 거실에 커다란 소파와 테이블이 꼭 등장했다. 거실 탁자에는 투명한 유리 접시에 과일 세 종류가 늘 올라가 있었다. 한 가지만 먹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 맛있는 과일을 동시에 세 가지나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할지 마냥 부러웠다. 주연 배우의 얼굴이나 대사보다 식탁 위 과일에 늘 눈이 머물렀다.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은 한 번에 과일을 세 가지 이상 골고루 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 부자는 아니지만 부자 흉내는 내볼까 싶어 비싸지만 맛있어 보이는 딸기를 종류별로 구매해 먹어보았다.
설향과 장희 그리고 금실이다.
딸기를 대표할 수 있는 반장 선거를 한다면 설향을 첫 번째로 뽑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딸기의 정석이랄까. 사람들에게 무턱대고 딸기를 그림으로 그리라고 하면 설향의 모습과 가장 흡사할 것이다. 과일가게 매대에 동그마니 어깨동무하며 누워 있는 이 작은 열매를 볼 때마다 아가들의 붉은 뺨이 절로 떠오른다. 달항아리처럼 오동통한 모양도 귀엽지만 새콤달콤한 맛과 부드러운 과육은 누가 먹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다. 누가 먼저 먹을세라 초록 이파리까지 붉게 잘 익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딸기를 제일 먼저 골라본다.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상큼함이 온몸에 퍼진다. 마치 내가 대왕 딸기가 된 것 같다. 그래, 이게 설향이지. 상큼한 설향은 특히 식후에 먹어야 제맛이다. 입안의 텁텁함을 빠르게 환기시켜 주며 행복을 선물하니까.
새콤보다 달콤을 선호하는 나는 장희를 더 좋아한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설향에겐 미안하지만 말이다. 장희는 모델처럼 길쭉길쭉해서 맛도 보기 전에 두 눈을 사로잡는다. 호기심에 자까지 들이대 길이를 재어봤더니 7~8센티나 되었다. 과육이 부드럽고 달달해서 크게 씹지 않아도 잘 으깨진다. 과육이 으깨질 때마다 내 귀에도 단맛이 나는 것 같다. 찾아보니 장희는 일본에서 온 친구다. 일본식 이름은 아키히메. 품종을 개발한 사람의 이름 첫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OO 아가씨” 정도가 될까. 언제부턴가 딸기를 겨울에 먹게 됐지만 히메라는 이름을 알고 나니 오뉴월 야생에서 자라는 봄날의 딸기가 떠올랐다. 아가씨와 봄은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니까. 갑자기 딸기향 같은 봄바람이 코 끝에 스치는 것 같다.
내가 맛본 금실은 논산에서 왔다. 논산은 기후와 토질이 딸기 재배에 적합해 국내 대표적인 딸기 주산지이기도 하다. 장희처럼 달콤하지만 과육이 단단해 제법 씹는 맛이 있다. 아삭아삭 조금씩 씹고 있으면 입 안에 무지개가 걸리는 것 같다. 은은하게 복숭아향이 난다는데 안타깝게도 내 코는 딸기향과 복숭아향을 잘 구분하지 못해 속상할 따름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금실에 코를 대고 킁킁 향을 맡아본다. 복숭아처럼 어여쁘고 푸릇한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겨울 딸기를 먹으면 미리 봄을 먹는 기분이다. 창 밖엔 눈이 펄펄 내리고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날 정도로 춥지만 빨간 딸기를 보면 곧 봄이 찾아오리라는 희망이 생긴다. 딸기에는 흙의 힘과 비닐하우스 속 빛과 열의 조화, 농부의 손길이 맞닿아 만들어낸 경이로운 자연이 모조리 담겨있다. 딸기를 입 안 가득 채우고 조심스레 으깨면 입안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눈 감고 먹으며 어느 품종의 딸기인지 기가 막히게 맞히는 달인은 아니지만 감히 딸기 소믈리에를 자처해 본다. 딸기를 먹는다는 건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