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디자이너라면, 모로 가도 서울로
디자인을 전공한 나에게 서울이란 희망사항이 아니라 필수조건이었다. 작업을 하다가 잘 안 풀리는 것이 있으면, 도심에 모여 있는 미술관에 가서 전시회를 관람하면 될 일이었다. 인쇄를 할 것이 있으면 충무로에 가서 인쇄 감리를 할 수도 있었다. 또 취업을 하기 위해서 디자인 클래스를 수강해야 한다면 홍대로 가면 되었다.
밖에서 작업하고 싶은 날이면 무중력지대(현 서울청년센터)라는 곳에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작업을 했었다. 그곳에서 소모임 모집이나 각종 행사 포스터가 붙여져 있는 게시판을 보면 동시대 청년들의 생각을 읽는데도 도움이 되었고, 이는 작업을 하는데도 좋은 아이디어로 작용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인데, 시각디자인 관련 일자리는 홍대 아니면 강남에 모여 있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웹디자인 인턴을 거쳐 편집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는데 업계 특성이라는 박봉을 견뎌가며 서울에 살아야 한다는 게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서울에 살아야만 해서 내 예술 활동이 이어질 수 있었다. 회사를 관두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할 때는 내가 스스로 일감을 찾아야 했다. 스튜디오 포스터와 명함을 뿌리며 직접 영업을 하러 다녔는데, 서울에 살고 있는 디자이너들을 알게 될 기회도 자연스럽게 주어졌다. 원거리에 있었다면 교류가 안 됐을 것이다.
다른 직업도 아니고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로 가도 서울에 가야 한다. 기회는 주어질 때 잡아야 하는 법인데 생각해 보면 서울에 있어서 주어진 기회들이 많았다. 어쩌면 별다른 게 예술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담론을 지향하면서도, 나의 예술 활동이 물리적 특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 모순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