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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름 Nov 11. 2024

무소의 뿔처럼 혼자 때로는 같이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며 맑게 비가 갠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가장 좋아하지만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한자가 있다. 바로 칼로 자른 벼나 보리 곡식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모습을 형상한 가지런할 제(齊)이다. 보리고개 시절을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가지런한 보리를 보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유는 그 속에 우리가 짐작도 하지 못한 너무나 큰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글자가 들어간 한자를 보면 대부분 가지런한 것과 관련이 있다.


가지런할 제(齊)에 물 수(水)를 더하면 건널 제(濟)가 되고,

제주(濟州), 백제(百濟), 변제(辨濟), 구제(救濟) 등의 어휘에 쓰인다.


물 수(水) 대신 달 월(月-살과 관련 있다)의 의미가 더해지면 몸의 정 중앙에 가지런히 달려있는 배꼽을 의미하는 배꼽 제(臍)가 된다. 아가들의 탯줄이 바로 제대(臍帶)이다.


이번에는 칼 도(刀=刂)를 추가해 보자. 칼로 가지런히 자른 약초라는 의미의 약 지을 제(劑)가 된다.

조제(調劑), 약제(藥劑), 항생제(抗生劑) 등이 이 글자에 해당된다.


가지런할 제(齊)에 보일 시(示=제사상)를 추가하면, '제사를 지낼 때와 마찬가지 마음과 자세로 깨끗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는 의미가 더해져 재계할 재, 집 재(齋)가 된다. 목욕재계(沐浴齋戒)에 쓰인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의미의 글자는 건널 제(濟)이다. 바다를 건너야만 도착할 수있다고 해서 제주도일까? 바로 그 제(濟)이다.

처음 이 한자를 배웠던 날도 그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금세 차오르는 감정의 신호를 온 얼굴로 느끼며 빨라진 심장박동 소리가 부끄러워 숨기려고 일부러 펜을 들었다 놨다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눈물을 참으려 애를 쓴다. 어쩜 이렇게 매번 이런 지. 친한 친구들과 혹은 편한 사람들과의 모임자리에서 한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경우 거의 매번 이 한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 물고를 먼저 터주길 애타게 기다린 가문 논밭의 도랑 마냥 신이 나서 침이 튀도록 혼자 한자이야기에 흥분을 한다. 처음엔 그냥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 정도의 가벼운 안부를 나눌 때 묻는 질문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모르고 틀어져버린 수도꼭지에서 주체 못 하고 흐르는 수돗물처럼 분위기 파악도 못한 채 한자이야길 쏟아 놓곤 했다. 그만큼 이 글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이 한자가 가진 의미를 나누고 공유하고 싶다고 항상 생각한다. 특히나 지나온 삶이 힘들어 지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싶거나 미래가 없다고 우울해하는 사람을 보면 늘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그 한자가 가진 의미가 너무 따뜻하고 심오하기에.


건널 제(濟)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길래 항상 입에 거품을 물고 신이 나서 떠들게 되는 걸까. 절대 유쾌하지 만은 않은 이 한자의 의미가 전해 주는 역설이 젊어서 한 고생이나 어린 시절의 아픔에 대한 토닥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한 인간이 맨몸으로 태어나 스스로 강을 건너가는 과정이 한 사람의 인생과 많이 닮아 그 과정에 비유를 하곤 한다. 당연히 처음에는 도구도 없고 경험도 없다. 오직 맞은편 도착지만 멀리 점처럼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도 않아서 막연하고 두려운 마음만 가득한 상태인 채 인생을 살아간다. 누구든 지금 있는 그곳을 출발해 맞은편으로 건너가려면 깊이도 형태도 알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한다. 삶이 두려운 이유는 어떤 일을 마주하게 될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즉, 삶이란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강바닥엔 무엇이 있고, 물살은 어떨지, 가다가 넘어지면 어떤 상태가 될지 알 수 없으니 두렵기만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내디뎌 보아야 맞은편 강둑에 언제가 되었든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릴 때야 엄마가 손도 잡아주고 이쪽이 안전하다 저쪽은 물살이 빠르다 알려줄 수 있지만 언제까지 엄마가 손을 잡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 건너야만 한다. 건너다가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 급물살이나 내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바위도 마주하게 되고 미끄러져 넘어져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가기도 한다. 마치 죽음을 무릅쓴 물소 떼의 필사적 몸부림처럼.



그렇게 강을 건너면서 우리는 넘어진 만큼 주머니에 작은 돌을 하나씩 주워 담는다. 강바닥에 있는 돌은 몸이 일부러든 아니든 젖어 불편한 것을 감수하고 몸을 숙이거나 넘어져야만 주워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넘어질 때마다 내 주머니가 무거워지는 것이고 많은 돌을 주웠다는 건 그만큼 많이 넘어졌다는 의미와도 같다. 많이 넘어질수록 점점 내 안에 돌이 가득 쌓인다. 그렇게 주머니 돌이 쌓이면 쌓일수록 웬만큼 센 물살쯤은 이제 중력의 힘으로 가볍게 밀고 나갈 수 있게 된다. 내가 돌을 주워 담을수록 , 넘어질수록 내 앞에 놓인 강바닥도 가지런해지고 점점 더 편하게 심호흡을 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주머니에 쌓인 돌들을 보니 '그동안 착실히 돌을 잘도 모았구나'라는 나에 대한 대견한 생각에 눈가가 잠시 촉촉해진다.


불과 며칠 전에도 강을 건너다 미끄러져 얼굴이 붉어지고 옷이 다 젖었지만 이 한자를 알고부터는 다른 마음자세를 갖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만의 강을 건너야 하고 그 길이 얼마만큼 평안했는지 고단했는지는 각자 자신의 그릇만큼 주어지는 것이니 돌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건 내 그릇이 그만큼 깊어졌다는 의미도 되겠다. 그럼에도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냥 이유도 없이 '억울하진 않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러면서 꼭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내 그릇의 깊이만큼 '옆사람의 손도 잡아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혼자 건너는 것보다 여럿이 손잡고 건너면 덜 넘어지지 않겠는가.




한편 아이를 키우면서 '아, 그동안 아이 앞에 놓인 돌을 치워주는 데에만 급급하여 바쁘게 살았구나' 되돌아보게 된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서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내가 앞장서 나가 아이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단지 편하게 나가라는 이유만으로 '아이에게 1도 도움이 안 되는 도움이라는 가면을 쓴 헛짓을 하고 살았구나. 무엇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면서 참 어리석었구나.'라고 생각해 본다. 사람이 실패를 겪지 않고 배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넘어지고 까지고 깨져봐야 더 잘 보이고 더 잘 기억이 나기도 하는 법이니까.


나를 성장시키고 아이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용기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적절한 타이밍의 조화가 강이라는 인생을 건너는데 필수 옵션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매일매일 하루에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돌을 주 주머니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어떤 물살에도 휩쓸려 떠내려 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의 고군분투(孤軍奮鬪)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저 고단함으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가지런할 제(齊)에 비 우(雨)를 추가하면 비가 갠 뒤의 가지런함을 나타내는 단어 비 갤 제(霽)가 된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은 비가 갠 뒤의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과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건널 제(濟)로 시작해 비 갤 제(霽)로 끝나는 인생을 한자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이제 난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성장을 도와주고 있는 '지원군이다'생각한다. 인생의 든든한 내편이 이렇게도 많다는 극단적 자기애로 가득 찬 행복한 색안경을 쓰고 오늘도 비가 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즐겁게 한자를 배우고 인생과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PS. 브런치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도록 손잡고 이끌어주신 이은경 선생님께 깊은 감사인사를 이 글을 통해 전합니다. 아직 혼자 강을 건널 용기와 자신감은 부족하지만 조금씩 용기 내어 한 발씩 내디뎌 보려고 합니다. 이번에도 넘어져 다치고 까지며 열심히 주머니에 돌을 차곡차곡 쌓아보겠습니다. 저도 언젠가 선생님처럼 제 도움이 필요한 분께 손 내밀어 도와드릴 날이 올 수 있도록 열심히 읽고 쓰겠다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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