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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름 Nov 02. 2024

누구랑 라면 먹을래?

이분, 저사람, 그인간

아이가 태어나 처음 배우고 하게 되는 말들은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쉽고 기본적인 말들이다. 엄마, 아빠, 아파, 싫어, 좋아, 까(과자 봉지 뜯어라), 가, 이거, 저거 등등등. 그리고 아이들이 영어를 배울 때에도 어린아이가 우리말을 배울 때와 같이 아주 기본적인 말부터 배우게 된다. mom, dad, sick, no, good, open, go, this, that etc.


엄마는 아이의 손동작만 봐도 한 단어만 들어도 아이의 마음 상태를 알 수가 있었다. 엄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마도 같은 인간이고 그 과정을 겪어온 같은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 말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순서에 따라 익히고 학습되는 것. 그리고 그 말과 글 안에는 우리가 모르고 사용하지만 여러 가지 인간의 심리 상태와 인식 상태가 내재(內在)되어 있다. 이렇게 무심코 쓰는 말과 글(한자)에는 우리 선조들이 어떤 의미와 심리와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더불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면 좋을지 알려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중에서 이것과 저것,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집중을 해보려고 한다.


이것, 영어로는 this, 한자로는 이 차(此). 이것은 가까이 있는 것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저것, 영어로는 that, 한자로는 저 피(彼). 저것은 멀리 있는 것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우리는 사람을 소개할 때에도 위의 지시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저는, 이쪽은, 얘, 이분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앉아 있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부를 때에도 우리는 지시형용사 "이, this"를 사용한다. 반면에 쟤, 저 사람, 저쪽, 저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이 있음을 듣는 사람은 은연중 모두 느끼게 된다. 아, 가까운 거리는 아니구나. 이때의 지시형용사 "저, that"이 거리를 알려주는데

한자도 이와 같아서

가까운 것 앞에는 이 차(此)를

먼 것 앞에는 저 피(彼)를 붙여 지시형용사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나온 단어가 차일피일, 어차피, 여차여차, 피차일반 등등등

차일피일(此日彼日), 이날 저 날 하고 자꾸 기한을 미루는 모양.
어차피(於此彼),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또는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여차여차(如此如此), 이러이러하게.
피차일반(彼此一般), 저것이나 이것이나 마찬가지임. 다 같음.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가을, 수확을 하고 곡식의 알갱이와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해 키질이라는 것을 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인네가 우는 애기를 포대기로 등에 달고 닭이 뛰어노는 너른 마당 한쪽에서, 이때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더욱 좋다. 곡식을 손목의 스냅과 물리적 반동을 이용하여 위, 아래, 좌우로 뒤집는 행위. 요즘 아이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잘 모르겠지만 위에 글로 상상이 되셨다면 당신은 연세 좀 잡수신 분. 나와 동년배이거나 좀 더 많을지도. 그러나 나이가 많다은 것은 아! 했을 때 어!라고 반응할 만큼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슬퍼하지 말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키질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아래 글을 읽어보자.


그렇게 키질을 하고 나면 속이 꽉 차서 무거운 알곡은 점점 더 나의 쪽에 가까워지고 가벼운 순서대로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즉 가까이 있는 것은 이것 차(此), 키 안에서도 나와 좀 떨어져 있는 쭉정이, 껍데기는 저것 피(彼)인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는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을 우리는 이 사람, 이분, 얘라 지칭하고, 나와 관계가 가벼운 사람을 저분, 쟤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나와의 관계가 꽉 찬 사람과 나와 관계가 속이 빈듯한 관계. 여기에 좀 더 나가 너무 가벼워 바람에 날아가 키 밖으로 떨어진 쭉정이 앞에 우리는 "그"라는 지시형용사를 붙인다. 인간관계에서도 사람 앞에 "그"자를 붙여보면 느낌이 바로 온다. "그 인간"


그럼 이제 대답해 보자.

"누구랑 라면 먹을래?"

이분, 저 사람, 그 인간!!


이분과 살고 계신가,

저 사람과 살고 있는가,

그 인간과 한 지붕 아래 있기만 한가.




내가 어릴 적 TV주말드라마에 등장하는 한 많은 여주인공의 엄마는 그녀의 아빠를 "그 인간"으로 불렀었다. 즉, 핵심은 내가 내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 앞에 어떤 지시형용사, "이"를 붙일지 "저"를 붙일지, "그"를 붙일지는 내가, 바로 내가 정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부르기로 정해서 부르면, 그 관계는 부르는 것 그대로 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보자. 인간관계는 내가 내 마음속에서 구분한 나만의 계급인 것이다. 나에게 상처 주는 옆집, 아랫집, 어느 동네 어딘가에나 있는 그 빌런들은 바람에 날려버리고 "이분"들에게 내 마음의 자리를 더 많이 내어주자. 마음의 공간에는 그 수용의 한계가 있다. 가볍고도 너무 가벼워서 날아가 버릴 정도로 먼 관계에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면 "이분들"을 둘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이분들이 많을 필요는 없다. 나에게 소중한 단 한 사람, 속이 꽉 찬 이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철없고 속없던 젊은 시절, 팔랑팔랑 가벼운 그 인간들의 번지르르한 겉모습이 좋아 보여 같이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게 간지나 보였던 적도 있다. 나이가 들어 경험과 연륜이란 것이 조금씩 쌓이니 속이 꽉 찬 소중한 것은 더 잘 보이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바람에 날려버릴 용기도 눈도 생기더라.


노안(老眼)이란 "사물을 시각적으로 보는 선명함은 줄어드는 대신 보이지는 않지만 훨씬 더 소중한 것을 보게 만드는 상태"라고 정의부터 다시 내려보자. 반갑다 노안(old 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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