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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철보신(明哲保身)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지키는 마음가짐

by 따름 Mar 30. 2025

차량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고속도로 위를 묵묵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앞선 차들과 나란히 흐르는 그 풍경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를 이동하는 공산품처럼 질서 정연하고 무표정해 보였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고, 저는 바깥 풍경과는 다르게 그 잔잔한 멜로디에 마음을 슬며시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온한 순간은 단숨에 깨져버렸습니다. 점선도 아닌 실선의 옆 차선에서 깜빡이도 없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차량. 접촉은 없었지만, 너무도 예상 밖의 상황에 심장은 벌렁거리고, 식은땀은 이마를 타고 흘렀습니다. 그 순간부터 음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문득 떠오른 단어—‘예상(豫想)’. 운전에서는 예상보다 예측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습니다.

‘예상(豫想)’은 단순히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보통의 장면일 뿐이지만, ‘예측(豫測)’은 실제 상황을 바탕으로 가능한 시나리오를 판단하고 대비하는 것, 즉 방어 운전의 핵심입니다.


예상(豫想) : 어떤 일을 직접(直接) 대하기 전(前)에
미리 상상(想像)함. 또는 그 상상(想像).


예측(豫測) : 미리 헤아려 짐작(斟酌)함.


저는 20년도 넘은 무사고 운전자입니다. 한문철 교수의 블랙박스 영상도 무서워 클릭하지 못할 만큼 조심스럽고 겁 많은, 전형적인 안전제일주의자지요. 그렇기에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은 언제나 평범하고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때문에 그날처럼 예상(豫想)을 벗어난 일이 벌어졌을 때, 저는 더 크게 당황하고 불안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측(豫測)을 제대로 했다면, 상황을 보다 빠르게 감지하고 덜 당황해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레 끼어든 옆 차선 운전자에게 순간 화는 났지만, 당연하게도 실망감은 들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그 이유는 감정의 구조에 있었습니다. 예상(豫想)과 예측(豫測)은 이성적 판단입니다. 그것들이 어긋나면 우리는 통제 불능의 상황에 분노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이럴 줄 몰랐는데."  "왜 저런 행동을 하지?" 이런 반응은 아주 자연스럽고 즉각적이지요.


기대(期待) : 어떤 일이 원(願)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림.


그러나 기대(期待)는 이와 결이 다릅니다. 기대에는 단순한 판단을 넘어서, 희망이라는 감정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잘되길 바란다." "분명 나를 이해해 줄 거야." 처럼 '기대(期待)'는 내 마음을 상대나 상황에 조심스럽게 얹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대(期待)가 어긋났을 때, 우리는 화를 내기보다 실망(失望)을 합니다. 그 실망은 분노보다 조용하고 길게, 더 깊숙이 마음에 남습니다. 게다가 상대에게 그 실망은 전염이 되어 상대의 기분마저 상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내가 품었던 희망의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감정의 방향을 결정짓는 건 ‘희망’의 유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끼어들었던 그 운전자에겐 실망감을 느끼지 않은 것입니다.


실망(失望) : 희망(希望)이나 명망(名望)을 잃음.
또는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마음이 몹시 상(傷)함.


즉, '예상(豫想)'이나 '예측(豫測)'에 '희망'이라는 따뜻한 양념을 한 스푼 추가하면, 마음속에 자연스레 '기대(期待)'라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아무에게나 희망(希望)을 걸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조심스럽게 희망(希望)을 품고, 기대(期待)를 걸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대(期待)’라는 이름의 구름은 점점 커지고 무거워지며, 내 마음과 내가 기대를 건 상대의 마음 모두의 한켠을 묵직하게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우리가 기대한 대로만 흘러가던가요? 아무리 치밀하게 예상(豫想)하고, 신중하게 예측(豫測)하고, 간절한 기대(期待)를 걸어도, 현실은 그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가곤 하지요. 그래서일까요. 처음의 설레는 기대(期待)는 종종 깊은 실망으로 변하고 맙니다.


희망이 없는 예상(豫想)과 예측(豫測)이 어긋나면 → 화가 납니다.

희망을 담은 기대(期待)가 어긋나면 → 실망하게 됩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아이들이 처음 두 발 자전거를 배우던 날이 떠오릅니다. 세 발 자전거에서 두 발로 바꾼 그날, 아이는 수없이 넘어지며 몸으로 배워갑니다. 자전거가 왼쪽으로 기울면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넘어질 때는 어디로 쓰러져야 덜 아픈지를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빠는, 아이가 단번에 성공하리라는 무모한 기대(期待)는 접고, 오로지 매 순간 아이의 균형과 안전에만 집중합니다. 그래서 고작 1미터를 가고 넘어진다 해도, 혹은 5미터를 달리고 쓰러진다 해도, 실망의 감정은 없습니다. 오직 ‘1미터에서 2미터로 가게 된’ 그 찰나의 변화가 벅찬 감동이 될 뿐입니다.


기대(期待)는 이처럼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는 독이 되기도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말이지요.


기대(期待)란, 어쩌면 내 마음대로 상대를 조종하고 싶은 감정을 돌려, 좋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기대하고, 그 사람이 내 기대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지극히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희망일지도 모릅니다. ‘희망’과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둘러놓은 채 말이지요. 그러니 실망하게 됩니다. 내가 마음대로 씌운 껍질이 벗겨진 걸 보고는, 상대를 탓하게 되는 어이없는 순간. 내가 씌우고는 내가 분노하는, 모순적인 장면 말입니다.


저는 이 마음을 아이들의 육아에도 적용해보고 싶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며 해야 할 일은, 무모한 기대(期待)가 아니라,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예측(豫測)이라고요.

혼자 기대(期待)하고, 혼자 실망하며, 그 실망의 감정을 아이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에게 ‘부모를 실망시키지 말라’는 무거운 감투를 씌우지 않도록 말입니다. 아이들은 모두, 부모에 기대에 부응하고 싶고, 부모가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반면, 사실에 기반한 예측(豫測)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신만의 길을 닦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든든한 안내자 역할을 해줍니다. 아직은 운전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혹시 일어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미리 알려주는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희망 섞인 기대(期待)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무겁고 부담스러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어른으로서, 이성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을까?


**예상(豫想)**일까,
 **예측(豫測)**일까,
 아니면 **기대(期待)**일까?


지나친 기대는 실망을 낳고, 그 실망은 관계를 흔들며, 아이의 마음에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나 예측은 사실을 바탕으로 가능성을 헤아리고 대비하는 지혜입니다. 스스로의 감정을 조율하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냉철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결국, 처세에 능할 뿐아니라 나를 지키고 관계를 지켜내는, 진정한 의미의 명철보신(明哲保身)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명철보신(明哲保身) : 총명(聰明)하고 사리(事理)에 밝아
일을 잘 처리(處理)하여 자기(自己) 몸을 보존(保存)함.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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