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붕 한중일
“꿔라오스, 닌하오! 칭뚸뚸관짜오!” (곽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만난 꿔라오스의 따뜻한 환대에 잔뜩 긴장한 채 움츠렸던 내 어깨가 금세 누그러졌다.
어설픈 중국어로 수줍게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섰다.
‘앗. 집이 엄청 깨끗하잖아?’ 당혹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중문학도이면서도 중국인에 대한 편견은 이토록 무섭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유로운 홈스테이 유학문화가 전무했던 2000년대 초반, 당시 중문과 전공생들의 중국 어학연수는 교환학생으로 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나는 당시 시 공무원이셨던 엄마의 ‘꽌시’ 인맥으로 자매도시 톈진의 한 선생님댁에서 홈스테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꿔라오스와 둘이 지낸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일본인 친구가 룸메이트로 새롭게 들어오게 되면서,
한중일 삼국이 한 지붕아래 모여사는 진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녀의 이름은 쿠사노 하루카. 엉뚱하고 유쾌 발랄 4차원 그 이상이었다.
자주 멍 때리고 있던 나에게, 눈을 희번덕하게 뜨고 혀를 내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얼굴을 내 턱 밑까지 내민다. 낯을 많이 가리고 소심한 나와는 정반대의 하루카가 꿔라오스의 집에 오자마자, 집안의 공기가 금세 ‘달콤 달콤’하게 바뀌었다. 덕분에 선생님도 나도 소리 내어 웃을 일이 참 많아졌다.
매일 저녁 8시, 우리 셋은 노트와 연필을 들고 거실 TV 앞 원탁 앞으로 모였다.
당시 인기를 끌던 가족시트콤('家有儿女', '거침없이 하이킥' 과 비슷한 느낌)의 열혈 팬이었던 나와 하루카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도 깔깔 웃어댔다.
중국 방송국은 친절하게도 모든 프로그램마다 자막을 달아주는데 중국어 학습자로서는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방송이 끝나면 적어둔 모르는 단어들을 꿔라오스가 재치 있는 설명으로 단번에 알아듣게 알려주셨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시시콜콜 수다로 이어지곤 했다.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 우리만의 밤 루틴이 참 행복했다.
오묘한 삼각관계임을 새삼 깨닫게 된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식사 중에 tv에서 일본총리 야스쿠니 신사참배 뉴스속보를 마주하게 된 우리 셋.
자극적인 내용에 불편한 기운이 감도는 침묵을 깨고, 꿔라오스가 하루카를 따로 부른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하루카의 얼굴은 침울해 보였다. 곧이어 나를 부르셨고, 하루카는 오늘 외출 금지,
나는 한국인이라 그나마 외출은 가능하지만 일본인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자제하라고 하셨다.
이런 뉴스가 나오는 날이면,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반일감정이 심한 중국에서는 일본인들이 대중교통 탑승거부를 당한다거나, 묻지 마 폭행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는 침대에 누워 긴 밤을 보냈다. 이렇게 할 얘기가 많을 줄은 우리도 몰랐다.
늘 웃어 보이던 하루카의 눈물을 본 것도 바로 그 밤이었다.
“미안해, 지민… 나 때문에 오늘 나가지도 못하고.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많이 부끄럽다.
왜 우리 조상들은 나쁜 잘못을 저질렀을까. 나라도 너에게 사과하고 싶어.”
잘못한 게 없는 하루카는 잘못 많은 일본 정부를 대신해 속 깊은 사과를 건넸다.
잘못한 누군가를 대신해 건네는 사과는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루카의 사과를 받는다고 해서 일본 정부의 잘못을 면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루카의 사과를 거절할 순 없었다.
끝내 흐느끼는 하루카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네가 왜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마. 일반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우린 다 똑같은걸.”
우리 둘은 자국을 변호하는 말들로 서로 날을 세우지 않았다.
꿔라오스도 외출을 자제하라고 알려주셨을 뿐,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뜨거운 감정을 주고받은 하루카와 나는 그날 이후로 더 가깝고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어갔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하루카가 먼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메일주소와 연락처를 주고받고는, 다음번에는 꼭 한국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며 작별했다.
(실제로 하루카는 약속을 지켰다. 다음 해 여름, 우리는 서울 데이트를 즐겼다.)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과 일본.
뉴스나 올림픽에서 선수들을 보면, 꿔라오스와 하루카를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메일과 연락처는 무용지물이 된 지금. sns 없었던 그 시절이 괜스레 야속하기만 하다.
'하루카는 어떤 남자를 만났을까? 아이는 몇 살일까?
분명 재미있고 이해심 많은 엄마가 되었겠지?'
그리고, 지금쯤 여든을 바라보고 계실 꿔라오스.
'그때 배우 같던 멋진 남자친구 할아버님과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계시겠지?'
이런저런 생각의 물꼬를 따라 어느새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20년 전 꿔라오스 댁에서의 국적과 나이를 초월한 찐한 우정을 나눈 그녀들이 오늘은 사무치게 그립다.
하루카와 꿔라오스께 다정한 안부를 전하며,
그곳에 닿을 만큼 크게 외쳐본다.
“니 하오 마?”
'다들 잘 지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