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먹고살 것인가

여행이 일상이 되고 일상이 여행이 되는 때

by 이현

일 년 동안 어학연수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내 나이 서른둘이었다.

"결혼은 언제 하려고 그래?"

생전 남자친구 있느냐 한번 묻지도 않던 아버지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서른둘까지 직업 하나 가지게 된 것 외에는, 내 인생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성과라기보단 내가 스스로 내 삶에서 만족스러운 부분이 없었다. 고등학교땐 대학 입시준비를 했고, 대학시절엔 취업준비를 했다. 취업하고는 사회의 자랑스러운 톱니바퀴가 되고자 노력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걸어온 이 길에서, 공교롭게도 내가 선택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부모님이 정해준 대학교와 전공을 선택했었다. 부모님이 정해준 직업으로 직장을 구했다. 아, 그중에 내가 선택한 것 단 하나 있었다. 본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취업을 하는 것. 부모님과 물리적 거리를 두고자 한 것. 그 외에는 다 부모님이 정해준 루트로만 살아왔다.

갑작스레 어학연수를 결심한 건 대단한 반항심이 든 것도 아니었고, 내 지루한 인생에 터닝포인트 하나 찍어보자 싶은 마음도 아니었다. 그냥 훌쩍 떠나고 싶어 졌고, 생각보다 내가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더 이상 내 커리어에서 써먹을 데도 없는 일 년짜리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모국어 외에 배운 언어라고는 영어밖에 없으니 영어권 국가로 정해야겠는데, 미국은 총이 있어 무서웠고 영국은 물가가 너무 비쌌다. 아일랜드는 날씨가 나빴다. 여기저기를 뒤적이며 찔러보다 듣도보도 못한 몰타(Malta)로 가기로 결정했다. 몰타는 유럽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나라로, 1964년 영국에서 독립한 영어권 국가였다. 물가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저렴하다고 했다.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몰타로 가면 유럽 여행은 실컷 할 수 있겠구나.


한국에서 몰타까지 가는데 꼬박 하루정도 걸렸던 것 같다. 유학원에서 연계된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유학원 소속 직원이 몰타살이에 대한 안내를 해 주었다. 숙소에서 어학원까지 가는 방법, 숙소 생활 지침, 현지 핸드폰 개통 등.

손바닥만한 기내식을 두세 번 먹은 게 기나긴 비행에서의 허기를 달래주지 못해서였을까. 지금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자, 몰타에서의 첫 장면으로 기억되는 곳은 어학원 직원이 안내해 준 식료품 마트이다. 그녀는 20장 정도 들어있는 커다란 식빵 봉지를 내 카트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사 두세요. 분명히 찾게 되실 거예요."

'무슨 식빵을 이렇게 많이 사란 거야. 식빵만 먹고살라는 건가.'

경험자의 충고는 언제나 옳은 법이다. 나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식빵 봉지를 뜯었고, 밤낮없이 식빵 봉지를 열어젖혔다. 타지에서 허기짐을 채우는 일은 좀처럼 쉽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은 고된 일이었다.

식빵을 곁들인 식사

'먹는 일'이 하루의 즐거움이 아니라, 다시 찾아온 ‘허기의 번거로움’이 될 때. 현실을 살아내는 중에는 지금 내 삶이 얼마나 지쳐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여행지가 일상이 된 타지에서는 상당히 귀찮은 문제가 된다. 전자와 후자 공통적으로, "내 입에 밥 넣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아주 먼 타지에선 일중의 일이었다. 몇 주간의 적응기 동안은 항상 허기가 져 있었다. 한국의 직장인이었던 나의 식습관은,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회사에서 때우고 저녁은 친구들과 약속 혹은 배달음식이었다. 몰타에선 아침을 거르면서부터 매우 곤란해진다. 어학원까지 가는 버스를 타면 꼬박 30~40분이 걸렸기에, 도착해 수업을 받기도 전부터 이미 배가 고파진다. 학원 수업이 끝난 오후에는 이미 뱃가죽이 등가죽에 들러붙었고, 대충 허겁지겁 허기를 달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배가 고파진다. 학원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근처 식당도 없는 주택가였기에 저녁은 숙소 안에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라면도 매번 컵라면이던 사람이다. 요리라곤 직접 해본 적 없는 나에겐 너무나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배를 곯으며 몇 주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어느 정도 나만의 루틴을 찾게 되었다.

아침식사는 어학원 앞의 '22nd January Cafe'에서 참치 샌드위치와 카페라떼 한 잔.

가게는 10평이나 될까 싶은 아주 작은 공간이었으나, 버스로 통학하는 어학원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소문이 난 카페였다. 아침에 그곳에서 커피를 사고 있으면 같은 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었다. 너도나도 쿠키, 샌드위치 등 먹거리 하나와 커피 한잔을 주문해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카페 앞 인도에는 야외 테이블이 세 개쯤 있었고, 아침마다 테이블에는 동네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에스프레소를 즐기고 있었다. 그 틈을 뚫고 들어가 나는 매일 아침 참치 샌드위치와 라떼를 샀더랬다. 이 카페는 개인적으로 정이 많이 든 곳이라 후에 따로 시간을 내어 적어볼까 한다.

자리마다 놓여있는 ‘22nd January Cafe’의 커피


점심식사는 둘 중 하나였다. 어학원 친구들과 학원 근처에서 같이 밥을 먹거나, 숙소로 돌아오는 길 터키음식점에서 터키식 샐러드를 사 오거나.

어학원은 몰타의 수도인 발레타 내에 있어서, 어학원 근처에는 괜찮은 식당들이 제법 많았다. 콜롬비아 친구들이 껴 있을 때면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갔고, 아시안 친구들끼리 있을 때면 차이니즈 레스토랑을 갔다. 각자 모국어는 잠시 뒤로 제쳐두고 어설픈 영어로 열심히 소통을 하는 시간이었다. 영어 실력도 변변치 않은데 악센트까지 달라서 소통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야외 테이블에 앉아 지중해의 쨍한 햇볕을 쬐며 샌드위치를 물고 와인이든 맥주든 콜라든 같이 나누고 있자면, 모두들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지를 일상으로 삼아 뛰어든 이방인들에게 이국적인 행복감은 인간으로서 같은 언어였다.

발레타 야외 레스토랑

터키 음식점에는 아저씨가 둘 있었다. 키 작은 아저씨 하나, 커다랗고 퉁퉁한 아저씨 하나. 키 작은 아저씨가 나에게 묻는다.

"어디서 왔어?"

"한국이요."

"남한? 북한?"

그러고는 혼자 깔깔 웃었다. 내가 두세 번째 방문할 때까지 똑같은 농담을 하며 똑같이 웃었다.

해외에 여행을 가면 시간이 곧 돈이며, 새로운 경험이 돈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지에서는 한국 음식은 찾지도 않을 것이며 현지음식만 잔뜩 경험해 올 다짐을 하기도 하지만, 며칠 되지 않아 김치찌개가 당기는 것이 한국인이지 않을까 싶다. 여행지에 마땅한 한식당이 없다면 차이니즈 레스토랑이라도 찾게 될 것인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는다면, 나만의 팁을 드리겠다. 터키 레스토랑으로 가시길 추천드린다. 정확한 이유는 분석하지 못했지만, 신기하게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다.

내가 맨날 들렀던 터키 케밥&샐러드집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샐러드지, 볶음밥부터 고기, 야채류까지 다양하게 밧뜨에 넣어두고 뷔페처럼 골랐다. 10유로에 3가지 종류를 고를 수 있는 식이었다. 처음엔 주문 시스템을 착각해서 음식 종류를 너무 많이 골랐는데, 그 키 작은 아저씨가 인자하시게도 내가 말한 음식들을 조금씩 다 담아주었었다.

“근데 사실은 10유로에 요리 3가지를 고를 수 있어. 다음엔 참고해 줘.”

유머와 함께 대단한 아량도 함께였던 터키아저씨. 양도 엄청나서 1인용 도시락 한 박스를 사면 한 끼에 다 먹지 못하고 결국은 그날 저녁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저녁은 점심에 남은 음식으로 때우거나 종종 한국 친구들끼리 모여 야경 좋은 음식점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 외엔 숙소에서 간단히 먹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방 3개짜리 플랫에는 5명이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몰타에 도착하고 한동안은 서로 돌아가며 요리실력을 뽐내며 다 같이 저녁을 먹었었다. 하지만 다들 스케줄이 제각각이고 같이 요리를 해 먹기는 쉽지 않았다. 타지에서 굶주린 게 나뿐이겠는가. 모두가 항상 배가 고픈 법이다. 더군다나 한식에 대해서는 항상 허기져있었다. ‘응답하라 1988’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만들어서 혼자 먹는다는 건 참으로 어색하고 민망한 일이었다. 넉넉히 만들어 같이 먹는 게 마음이 편했다. 마음은 편했고 지갑은 불편했다. 수입 없이 지출만 있는 현 상황에서 다른 입들까지 생각할 마음의 여유는 쉽사리 나지 않았다. 그렇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런 경계 설정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조용히 혼자 먹기도 민망했고, 다 같이 먹긴 부담스럽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선의의 행동이 항상 선의로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선의를 베푸는 사람의 욕심일 뿐. 누군가의 선의가 조용히 먹히기만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에 혼자 뾰루퉁해지는 내 마음도 참 싫었다. 경계 설정에 실패해 작은 속앓이가 쌓인 것이, 후에 플랫에서 나와 따로 방을 구하고자 마음먹은 가장 큰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타지생활에서 어떻게 먹는 일에 적응을 했는가. 아침은 단골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고, 점심은 발레타 레스토랑 도장 깨기를 했으며 저녁은 즉흥적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한식의 허기를 달래줄 비상식량이 있었어야 했기에, 내 식료품 창고에는 항상 불닭볶음면이 종류별로 쌓여있었다.

식량창고

표면적으론 그렇다. 중요한 건 마음의 회복이 아니었나 싶다. 현실에 지쳐 도망치듯 몰타로 떠나왔을 땐, ‘먹는 일’ 뿐만 아니라 만사가 다 버겁고 힘들었다.(물론 해외에서 일 년 살기라는 타이틀에서 오는 설렘도 있었고, 그건 나의 유일한 원동력이었을 거다.) 커다란 장독대에 한 방울씩 채우듯이, 내 마음은 아주 조금씩 회복이 되고 있었다. 그 후에야 나는 ‘작은 일’을 딱 그만한 크기의 ’ 작은 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때가 되자 ’ 먹는 일‘도 내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 하루의 소소한 즐거움이 될 수 있었다. 방법적인 문제보다도 마음의 에너지를 키우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떠한 일을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방법이 무엇이든 그 일을 어떻게 맛있게 소화하느냐는 내 마음가짐과 긍정적인 에너지의 문제였다.

이제는 내 마음가짐과 에너지 정도는 컨트롤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동화적인 결말이다. 다만 깨달았을 뿐이다. ‘밥 먹는 일조차 버거울 땐 내가 에너지가 바닥이 나 있는 것이구나.’하는 깨달음. ‘내가 어디까지 다시 굴러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깨닫고 인지한 거기에서부터 다시 올라가자. 그러기 위해선 먼저 웅크려보는 것으로 시작해도 된다.’는 정도의 아주 작은 자기 확신. 내가 얻은 것은 이 작은 몇 가지 정도라는 게 현실적인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만족한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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