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도 기다려주지 않는 스위스 기차
내 지인 중 한 명이 스위스 뉴샤텔에 살 때의 이야기다. 어느 평범한 아침, 기차 시간에 늦을까 봐 뉴샤텔 역으로 허겁지겁 뛰어가고 있었는데, 옆에서 정장을 입고 같은 방향으로 뛰어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탑승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이 바로 스위스 대통령이었다는 것!! (지인이 법을 전공하고 있던 터라 더 잘 알아본 것이다.)
대통령이 일반인과 함께 기차역까지 뛰어간다니! 경호원도 없이, 그냥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말이다. 어떤 나라에서 이런 일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런데 스위스에서는 어떨까? 놀랍게도 정반대다. 대통령이 되는 것을 기피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스위스 대통령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7명의 연방위원(장관)이 함께 나라를 이끄는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한다. 이는 일반적인 내각제와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시스템이다. 보통 내각제에서는 총리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내각을 이끌지만, 스위스에서는 7명이 모두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
이 중에서 매년 돌아가면서 한 명이 대통령 역할을 맡지만, 그저 '회의 진행자' 정도의 역할일 뿐이다.
스위스 대통령에게는 특별한 권한이 거의 없다. 다른 6명의 연방위원과 동등한 한 표를 가질 뿐이고, 급여도 똑같다. 심지어 대통령이 되면 더 많은 업무와 책임만 떠안게 된다.
그러다 보니 연방위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간다고 한다.
"내년에 대통령 차례인데... 좀 힘들겠네." "그러게, 해외 순방도 많아지고 공식 행사도 늘어나고..."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 or 용산? 에 들어가 최고 권력을 누리지만, 스위스에서는 그냥 업무량만 늘어나는 '당번' 같은 개념이다.
실제로 2014년 대통령을 지낸 디디에르 뷔르크할터는 대통령 임기 중에도 계속 자택에서 거주하며 기차로 출퇴근했다. 어느 날은 기차역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일반 시민들과 함께 열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기자에게 포착되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내 지인이 그날 아침 함께 뛰었던 사람이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많이 놀랐다. 사실 뭐...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은 사실이었고 내 지인은 그냥 대통령 한 명을 만난 게 아니라, 스위스라는 나라의 다른 모습을 본 거였다.
이런 독특한 정치 시스템이 가능한 이유는 스위스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 있다. 13세기부터 시작된 700년 넘는 직접민주주의 전통이 이 나라 사람들에게 '함께 결정하고 함께 책임진다'는 문화를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마을 광장에서 모든 시민이 모여 손을 들어 의사결정을 하던 란츠게마인데(Landsgemeinde) 전통, 중요한 사안을 국민투표로 결정하는 관습 등이 수백 년간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모든 걸 결정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이 시스템은 단순히 정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적·문화적 토양에서 자라난 결과물이다. 다른 나라에서 똑같이 따라 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11년 동안 여기 살면서 느끼는 건, 이 나라는 큰 권력보다는 작은 배려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다. 마트 영업시간도 국민투표로 정하고, 라보 포도밭에 경사 보조금도 주는 이 나라에서, 대통령 역시 시민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시민과 함께 하는 존재인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다른 나라도 무조건 따라 해야 할 정답은 아니다. 스위스는 인구가 900만 명 정도로 작고, 수백 년 동안 직접민주주의를 해온 경험이 있다. 이런 여러 조건들이 다 맞아떨어져서 가능한 일이다.
한국은 인구도 5배 이상 많고, 사회 변화도 훨씬 빠르고, 역사적 경험도 완전히 다르다. 각 나라마다 그 나라에 맞는 방식이 있는 법이다.
물론 알고 있다. 이런 시스템이 가능하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숙한 개인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걸. 매년 여러 차례 국민투표에 나가고, 복잡한 사안들을 꼼꼼히 따져보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며 토론할 수 있는 시민 의식이 필요하다는 걸.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스위스도 아주 긴 시간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된 거니까.
그래도 부럽다. 많이....
한국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까? 정치가 갈등과 대립의 도구가 아니라, 진정으로 모두를 위한 대화와 토론의 장이 되는 날 말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욕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함께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는 그런 정치 문화가 자리 잡는 날....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