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위스 철도 이름은 왜 이렇게 길까?

단결됐으나 획일적이지 않는 신비

by 에라토스


▐ SBB CFF FFS, 이게 대체 뭘까?


스위스에서 거주하다 보면 가끔 기차를 탈 일이 있다. 특히 차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장거리 이동시에는 무조건 기차를 타야 한다. 처음에는 기차를 아무생각 없이 그냥 탑승하다가 기차 옆에 쓰여 있는 이름에 눈길이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름을 보게 되면 이상한 점이 있다. SBB CFF FFS 이게 뭘까?



한국의 코레일 같은 간단한 명칭을 상상했는데, 마치 암호 같은 이 세 글자 조합이 궁금해진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스위스 연방 철도(Schweizerische Bundesbahnen) 이름을 3개 국어로 해놓은 것이었다. SBB는 독일어, CFF는 프랑스어(Chemins de fer fédéraux suisses), FFS는 이탈리아어(Ferrovie federali svizzere)였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든다. 스위스는 4개 공용어를 사용하는데, 왜 3개 언어만 적혀있을까?



▐ 만약 4개 언어를 다 적었다면?


스위스의 4번째 공용어인 로망슈어를 포함하여 4개 언어를 모두 적었다면 SBB CFF FFS VFS가 되어 무려 12글자의 약자가 탄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망슈어 사용자는 스위스 전체 인구의 단 0.5%에 불과하다.


실용성을 고려해 3개 언어만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주요 기차역 곳곳에서는 로망슈어 안내방송도 들을 수 있다니, 소수 언어에 대한 배려가 놀랍다.



▐ 한 나라 속의 외국 여행


나는 불어권 스위스에서 살고 있지만 같은 스위스라고 해도 운전을 해서 독어권으로 가면 '오, 외국에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며칠 전 재외국민 투표를 하기 위하여 베른을 방문하였다. 이런 경우 스위스에 살고 있어서 주스위스 한국대사관을 방문하게 되는데, 한국대사관이 있는 곳은 독어권 지역이다. 그래서 베른에 갈 때면 다른 나라에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같은 나라 안에서 언어가 바뀐다는 건 정말 신기한 경험이다. 휴게소에 들러 물건을 구입할 때도 다른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ㅎㅎ 기차를 타고 가다가 안내방송도 독일어로 바뀐다. 그럴 때면 '아, 이제 독일어권에 들어섰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한 나라 속에서 느끼는 이런 어색함과 신기함은 스위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 않을까?



▐ 4개 언어가 공존하게 된 역사적 배경


그렇다면 스위스는 어떻게 4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이 독특한 언어 상황은 스위스의 복잡한 역사와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5세기경, 켈트족의 한 갈래인 헬베티아족이 스위스 지역에 정착했다. 이후 기원전 1세기경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라틴어가 널리 퍼졌고, 이는 오늘날 스위스의 로망슈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로망스 계열 언어의 기반이 되었다.


5세기에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중요한 전환점이되었다. 서부 지역에는 부르군트족이, 동부 지역에는 알라만족이 정착했다. 부르군트족은 점차 라틴화되어 오늘날의 프랑스어 사용 지역이 되었고, 알라만족은 게르만 언어를 유지해 독일어 사용 지역의 뿌리가 되었다.


이탈리아어는 알프스 남쪽의 티치노 지역이 역사적으로 북부 이탈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정착했다. 이 지역은 오랜 세월 동안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정치·문화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로망슈어는 특히 흥미로운데, 이 언어는 고대 알프스 지역의 원주민(라에티아인 등)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라틴어를 받아들인 결과로 발전했다.


로망슈어는 라틴어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언어 중 하나로, 오늘날에도 스위스 그라우뷘덴 주에서 소수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로망슈어로 스위스는 '스비츠라(Svizra)'라고 표기한다.


이처럼 스위스의 4개 공용어는 각기 다른 민족의 이주와 정착, 로마화, 그리고 산악 지형에 따른 지역적 고립과 자치 전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오늘날에도 각 언어권은 주(州) 단위로 뚜렷하게 구분되며, 연방주의와 소수 언어 보호 정책 덕분에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 갈등을 화합으로 바꾼 지혜


놀라운 것은 이런 언어적 다양성이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화합의 상징이 되었다는 점이다. 19세기 초반까지는 실제로 언어와 종교 때문에 많은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스위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주의와 상호 존중의 원칙을 선택했다.


공공 문서와 주요 안내문은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공용어로 발행된다. 연방 차원의 공식 문서는 주로 세 언어로 제공되고, 일부는 로망슈어로도 출간된다. 공공장소의 안내문이나 상품 포장지에서도 여러 언어가 함께 표기되는 것이 당연해졌다.


학교에서는 주로 사용하는 지역 언어 외에 다른 공용어 하나 이상을 의무적으로 교육하도록 했다. 그 결과, 다양한 언어권 사람들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스위스 연방 의회에서는 정치인들이 각자 본인의 언어로 발언하면서도, 동시통역이 제공되어 서로를 원활하게 이해한다.



▐ 작은 언어도 포기하지 않는 나라


특히 인상적인 것은 로망슈어에 대한 스위스의 태도다. 전체 인구의 0.5% 정도인 약 35,000명만 사용하는 이 언어를, 스위스는 1938년 국어로, 1996년에는 연방 차원의 공용어로 공식 인정했다.


로망슈어는 사실 통합된 언어가 아니라 5개의 주요 방언들이 모인 것이다. 그래서 1982년 언어학자가 표준 로망슈어인 '루만치 그리준(Rumantsch Grischun)'을 만들었지만, 각 방언 사용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방언을 고집한다. 심지어 다른 방언 사용자와 대화할 때는 독일어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스위스는 이 '비효율적'인 언어를 보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자한다. 교육자 육성, 교재 개발, 방송 프로그램 제작까지… 마치 멸종 위기 동물을 보호하듯 언어를 지키고 있다.



▐ 기차 이름에 담긴 작은 나라의 큰 지혜


다시 기차로 돌아가 보자. SBB CFF FFS라는 기차 이름을 보면서, 이게 단순한 약자가 아니라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간다'는 스위스의 철학이 담긴 상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구 900만 명도 안 되는 나라에서 4개 언어를 공용어로 유지하는 것은 분명 비효율적이다. 효율성만 추구했다면 하나의 언어로 통일했을 텐데, 스위스는 '아름다운 비효율'을 선택했다. 마트 영업시간처럼, 라보의 경사 보조금처럼, 스위스는 언제나 효율보다 가치를 우선하는 것 같다.


SBB CFF FFS라는 기차 이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 온 나처럼 단일 언어 국가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한 나라를 여행하면서 아침에는 프랑스어로 뉴스를 듣고, 기차를 타면 독일어와 이탈리아어 안내방송을 들으며 여행을 하다가 저녁에는 로망슈어 간판을 발견하는 일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처음에는 복잡하고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런 다양성이 주는 풍성함을 느끼게 된다.


아홉 글자(SBB CFF FFS) 속에는 700년 넘게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단결됐으나 획일적이지 않게' 함께 살아온 지혜가 담겨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keyword
이전 03화스위스, 경사도에 따라 보조금을 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