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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치과-치통이 선물한 한국행 티켓

스위스에서 한국으로 치과 다니는 이유

by 에라토스




아플 때가 제일 서글프다


스위스에서 11년째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외국 생활의 수많은 고충 중에서도 가장 서글픈 순간은 단연 아플 때다. 스위스 병원 시스템과 의료 문화는 한국과는 너무 달라서, 몸이 아프면 마음까지 덜덜 떨리는 것 같다.


특히 만국 공통의 고통, 치통이 찾아올 때면 그 서러움은 스위스 융프라우 산 정상보다 더 높이 치솟는다. 게다가 바로 갈 수 있는 병원을 찾지 못하면, 그 고통을 안고 며칠을 버텨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의학계에서 3대 통증 중에 하나라고 알려진 급성 치수염처럼 진통제도 소용없는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내 심정을 백번 이해할 것이다.


나 역시 2년 전에 급성 치수염으로 '생지옥'을 한 번 경험하고 나니, 이제는 치아에 살짝 통증만 느껴져도 온몸이 비상 상태로 돌입한다. 가뜩이나 치아가 선천적으로 부실 공사라 웬만한 치과 시술은 다 섭렵한 '치과 베테랑'으로서, 이 고통이 단순한 엄살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



스위스 병원, 비싸고 느리고...


스위스에서는 웬만해선 병원에 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병원 예약하고 기다리는 동안 이미 병세가 반쯤 호전되거나, 막상 가도 "이거 먹고 좀 쉬세요" 수준의 기본 약만 처방해 줘서 속 시원한 해결책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를 풀자면, 예전에 딸내미 피부에 정체불명의 염증이 생겨 병원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과 심도 있는(?) 상담 후 받은 처방은… 두둥! 한국에서도 흔히 쓰는 후시딘 연고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지불한 돈은 무려 240 프랑 (약 38만 원)! ㅎㅎㅎ 당시 집에 있던 후시딘을 병원에서 처방받아 나오며 헛웃음을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치과 진료비, 심장이 쿵! 지갑이 열린다...


나는 올해 여름이 많이 바쁠 예정이다. 논문도 써야 하고 딸이 방학에 들어가면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항상 하필이면! 이 중요한 시기에 이빨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을까? 통증을 참으며 평소에 다니던 치과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은 안타가운 표정으로 결국... "크라운 치료 하셔야겠네요"라고 말씀하셨다.


스위스에서 치과 치료비는 후덜덜하다. 특히 크라운치료가 비싸게 느껴지는데, 신경치료를 동반한 크라운 치료는 보통 하나에 2'500에서 4'000 CHF (약 400만 원에서 650만 원)에 이른다. 나의 경우엔 2'900 CHF (약 450만 원)이라는 다행히도(?) 괜찮은 견적을 받았다.



스위스 치과비, 대체 왜 이렇게 비싸?


스위스 치과 진료비가 비싼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스위스는 전반적인 물가가 높고, 의료 시스템 비용도 이에 맞춰 형성돼 있다. 치과 치료의 경우 대부분 비용이 환자 본인 부담이며, 기본 건강보험으로는 성인 치과 치료가 거의 커버되지 않는다. 추가로 치과 보험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 치과 의사들의 높은 임금, 첨단 장비 및 재료 비용, 그리고 스위스 특유의 깐깐한 서비스 품질 기준이 비용을 더 끌어올린다.


다행히도 나는 괜찮은 치과 보험을 가지고 있어 연간 2'300 CHF (약 350만 원) 정도는 커버가 가능하다. (이거라도 없었으면 아마 11년 동안이라는 시간 동안 치과에 수천만 원을 줬을 것이다.) 그래서 "뭐, 이 정도면 선방이지!"라며 스위스에서 치료받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 드라마가 시작됐다! 운명의 장난인지, 2025년이 반년이나 남은 시점에 반대편 치아까지 문제를 일으켰다. 멀쩡하던 반대편 어금니마저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한 번 치료받은 치아라 직감적으로 "아… 너도 크라운으로 가려는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세기의 대결: 스위스 치과냐!, 한국행 비행기냐!


내 머릿속 계산기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옵션 1: 스위스에서 눈물을 머금고 크라운 두 개 치료 (보험 적용해도 어마어마한 추가금 발생).


옵션 2: 비행기 타고 한국 가서 'K-덴탈'의 신세계를 경험하고, 겸사겸사 쇼핑도 하고, 그리웠던 한국 음식도 실컷 먹고 돌아온다!


몇 번이고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스위스에서 크라운 치료를 받는 비용과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가서 치료받는 비용을 비교하니, 놀랍게도 한국행이 더 저렴해 보였다.


한국에서 제일 비싼 크라운 치료를 받고, 필요한 물건 잔뜩 사고, 맛있는 음식 배 터지게 먹고 돌아와도 스위스에서 치료받는 것보다 돈이 덜 들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우선 비행기 표를 검색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기적적으로 369 CHF (약 63만 원)에 체크인 수하물까지 포함된 '특가 항공권'이 눈앞에 딱 나타난 것이다! "이건 운명이야!"를 외치는데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에 한국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딸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 데리고 가자!



딸과 함께, 한국으로 떠나는 '치과 투어'


결국 이렇게 한국을 가게 됐다. 딸아이의 비행기 비용까지 포함해도, 한국에서 치료받고 돌아오는 게 스위스에서 치료받는 것보다 여전히 저렴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이쯤 되면 내 이빨이 스위스 물가에 지쳐 강제로 한국행 효도 관광을 보내주는 건가 싶었다. 딸에게 "아빠 이빨 때문에 우리 한국 가게 생겼어!" 하니,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내 치통이 졸지에 딸에게는 '산타클로스'가 된 순간이었다.


딸의 학교 일정을 고려해 나는 몇 주간 진통제로 버티기로 하고, 6월 말에 딸과 함께 한국행을 결정했다. 이게 바로 스위스 물가가 낳은 '치과 투어'의 탄생이다.



이빨 하나가 만들어낸 특별한 여행


스위스에 살면서 치과 치료 때문에 비행기 타고 고국으로 '원정 진료'를 떠나게 될 줄이야! 이 기막힌 상황에 헛웃음이 나면서도, 그리웠던 한국 음식과 가족들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어쩌면 스위스의 이 비싼 물가가 아니었다면, 이런 특별한(?) 한국 방문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치과비 때문에 바쁜 일정을 쪼개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이 여정도, 언젠가 딸과 함께 "그때 아빠가 이빨 아파서 한국 갔었지!" 하며 깔깔 웃으며 떠올릴 추억이 되지 않을까?



그나저나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의 치통이 이 상태로 잘 머물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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