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의 놀라운 비밀
한국에서 살아갈 때는 5분이라는 시간의 비용에 대하여 크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굳이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중, 고등학교 시절 노래방에서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급했던 기억이 있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다가 시간이 다 되면 카운터로 달려가 "10분만 더 넣어주시면 안 되나요? 5분만 더 넣어주시면 안 되나요?"라며 애원하던 모습 말이다. 그 풋풋했던 젊은 날의 5분 10분의 추억들은 어느덧 잊혀져 가고 있었다.
스위스에 와서 의료 시스템을 경험하며 5분이라는 단위는 나에게 새로운 의미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몇 년 전, 딸아이가 중이염으로 고생했을 때 병원 응급실에 간 적이 있다. 그날 만난 의사 선생님은 정말 친절했다.
딸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며 내 질문에 하나하나 답변해주고, 심지어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농담까지 건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5분, 10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동네 병원 응급실이었지만, 응급실 특성상 급한 상황이 많을 텐데도 한 환자에게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진심으로 대해주는 모습에 깊이 감동받았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면서 속으로 "아니, 환자 한 명에게 이렇게 많은 시간을 써도 괜찮은가? 이런 식이면 하루에 진료를 몇 명이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며 놀라움과 고마움이 뒤섞였다.
하지만 그 따뜻한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뒤 집으로 날아온 병원 청구서를 열어본 순간, 그 환상이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청구서에는 상담비용이 5분 단위로 나뉘어 4번, 즉 20분에 대한 금액이 적혀 있었다.
각 5분마다 38 프랑 (6만 원) 이었다. 순간 머리는 멈췄고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5분'이라는 시간에 대해, 특히 누군가의 숙련된 노동을 5분 동안 빌리는 것의 경제적 가치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동시에 의사 선생님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친절한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서 서툰 불어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보낸 모습... 마치 불어회화수업을 하고 있는 듯한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1분당 약 만원이 넘는 인생 상담비용을 치렀고, 그로 인한 지갑의 통증은 꽤 오래 갔었다.
그렇게 5분의 아픔은 잊혀지는 듯했다.
최근 아내가 치과에서 스케일링을 받고 온 청구서를 보는 순간 옛 기억이 바로 떠올랐다. 스케일링은 의사의 진료가 필수적인 치료는 아니지만, 전문 교육을 받은 치위생사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청구서를 보니 시간이 5분 단위로 나뉘어 총 10회, 즉 50분에 대한 비용이 청구되어 있었다. 이 역시 단순히 '스케일링 한 번'에 대한 비용이 아니라, 치위생사의 노동 시간을 아내가 구매한 것에 대한 대가였다.
스케일링이 많이 필요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시간이 걸리니,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쪼개서 돈을 청구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비용은 모두 보험으로 커버가 되긴한다. 그러나 보험이 비싸니... 그 돈이 그 돈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단순히 돈을 더 받으려는 게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정확히 계산하는 시스템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아내는 스케일링을 받는 비용으로 총 214 프랑 (약 34만 원)을 지불하였다.
스위스는 물가가 높기로 유명한 나라다. 이 높은 물가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인건비다. 인건비가 높다는 건 결국 노동의 기본 비용이 높다는 의미고, 한 사람이 하는 노동의 가치를 매우 높게 책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이다.
5분 단위의 청구는 단순한 돈 계산이 아니라, 전문가의 시간과 노력을 정당하게 보상하려는 스위스 사회의 깊은 신념을 반영한다. 나 역시 스위스에서 11년을 살며, 비록 지갑은 아프지만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단순히 비싼 비용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노동이 가진 가치와 그에 대한 존중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었다.
스위스는 연방 차원에서 정해진 법적 최저시급이 없는 몇 안 되는 선진국 중 하나다. 대신, 각 주(칸톤)나 산업별로 노동조합과 고용주 간의 협상을 통해 임금이 결정된다. 그러나 일부 주에서는 최저임금을 법적으로 정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이다.
예를 들어, 제네바주는 2020년 국민투표를 통해 시간당 23 CHF (약 3만 5천 원)이라는 최저시급을 도입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최저임금 중 하나로, 2025년 기준으로도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뉴샤텔주와 쥬라주 등에서도 유사한 최저임금 제도가 시행되고 있으며, 대체로 시간당 20-23 CHF 수준이다.
이러한 높은 임금 수준은 스위스가 노동의 가치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것이 하나의 기준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요인들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나라가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것은 일상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앞으로 AI 시대가 본격적으로 오면 인간의 노동 가치는 어떻게 책정될까? AI가 단순 반복 작업뿐 아니라 창의적 영역까지 침투하면서, 인간의 시간과 노력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지금 AI 윤리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는 나로서는 이 주제가 끊임없이 파고들고 싶은 화두다.
AI가 많은 직업을 대체할 미래에, 스위스처럼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문화가 유지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의 노동은 점점 더 평가절하될까? 예를 들어, AI가 의료 상담의 일부를 대체하게 된다면, 의사의 5분은 여전히 지금과 같은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다.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의미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스위스의 사례는 하나의 중요한 예시가 될 것 같다.
스위스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번 청구서를 받을 때마다 "또 얼마야?!"라며 놀라는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다. 병원비, 치과비, 심지어 일상적인 서비스 비용까지, 스위스의 물가는 늘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그것에 합당하게 지불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이 사회의 문화는 한편으로는 참 부럽고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5분이라는 짧은 시간조차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스위스의 태도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는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귀한 시간을 사용하여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두 손을 높이 들어 감사 인사를 올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