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더 감사합니다.
[사람인 알림] 박ㅇㅇ님 채용담당자로부터 포지션 제안이 도착했습니다. 제안 내용 확인 후 답변을 보내주세요!
답변 마감일 2025-04-05
포털사이트의 2년 만의 제안. 자네 이직할 생각 없는가? 있죠. 있어요. 차로 30분 떨어진 거리라 썩 내키진 않지만, 제안 내용에 솔깃했다. ’ 회사까지 제가 태워드리고 면접비 5만 원 드립니다. 이동시간 포함하여 4시간 소요 예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주말을 통해 만나 뵈고 얘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나의 포지션은 CAD 프로그램으로 도면 그리는 일이다. 기계 설계자라는 조금 거창한 직업명도 있지만 기계나 설계전공이 아니었고(심지어 문과생) 사명감 없이 일하고 있어서 쓰지 않겠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설계하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을 몇 개 소개하자면. 스트레스와 기초체력 부족으로 아주 말랐거나 뚱뚱한 체형을 가지고 있다. 납기가 있는 일을 하고, 제품이 제작되거나 사용되는 중에도 도면 수정사항이 빈번해서 예민함과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러한 이유들로 직업군을 여러 번 바꾸려 했지만. 경력이 또 경력이다 보니, 어느덧 10년째. 초점이 뚜렷하지 못한 것도 설계직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중소기업에 다닐 생각이라면, 잡플래닛의 회사 조회는 필수다. 물론 대부분 나쁜 평판과 단점들이 수두룩 하다. 회사가 좋은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있다고 한들 회사의 장점을 정성스레 잡플래닛에 공유할 사람은 몇 없다. 그래도 나열된 단점이 내가 견딜만한 단점인지 확인해 볼 수 있다. 기본 중에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회사는 거를 수 있다. 그러나 포지션 제안받은 곳은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사전 정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회사. 그래도 면접을 보려고 했던 것은, 회사까지 태워주겠다는 호의. 그리고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아니 들어보지도 못한 ’ 면접비 5만원‘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나 걱정되는 건, 왜 주말을 통해 만나자는 건지? 이 사람은 주말에도 회사에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가졌다. 중소기업 면접은 주말에 보면 안 된다. 사무실의 분위기와 함께 일할 사람들의 복장, 표정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온종일 함께 있어야 하는 동료는 어쩌면 일보다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자차로 가겠다며 평일 10시 면접 약속을 잡았다. 경북 영천시에 위치한 어느 허름한 공단에 도착했다.
믹스커피를 받아 사무실 한편에 앉았다. 공간 구분을 겨우 해낸 파티션을 보자마자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면접을 본다고..? 가죽의자는 다 갈라져있네, 테이블 아래 먼지가 소복하구나. ‘유년시절 피아노를 덮어뒀을 법한 테이블 사이에 끼워진 하얀 천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문양을 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내 든 생각. 집에 가야 하나.
면접관-회사 4개 다니셨고요?
면접관의 첫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 대신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 자기소개를 준비해 왔건만, 면접관은 자신이 이해한 나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꼼꼼히 보셨나 보다. 회사는 허름하지만 어쩌면 이 상사. 나에게 꽤 괜찮은 상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면접관-제가 간단한 테스트를 준비했습니다. 장비와 프로그램이 익숙지 않은 건 고려해서 보겠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도면 그리기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워 당황스러웠지만, 그의 입장도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간 입사 희망자의 이력서에 기술된 실력에 대해 속았던 적이 많을 거다. 이래서 면접비를 주는 거구나.. 오른쪽 어깨너머의 그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중압감을 이겨내며 양손을 바삐 움직였다. 사실 손보다 바쁜 건 두 눈과 생각이었다. 그의 책상엔 전자담배가 3단으로 올려져 있고, 먼지가 많았다. 업무 스트레스를 흡연으로 푸는 사람. 그리고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비워진 자리가 보였다. 문과 가깝고 모니터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절대 피해야 할 자리. 아마 저기가 내 자리겠다 싶었다. 한 가지 의아했던 건 사무실에 자리한 사람들이 내가 공간에 머무른 1시간 반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면접관 - 수고하셨어요. 면접비는 카카오페이로 보내드렸습니다. 1년 계약직으로 제안합니다. 급여는 3900이고요, 토요일은 격주 근무인 거 아시죠? 유동적이지는 않고 정해져 있습니다.
카카오페이라.. 면접비의 존재만큼이나 지급 방식도 굉장히 이색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쓰읍,, 생각해 봐야겠네요. 1년 계약직은 상관없지만 (1년 전에 그만둘 확률이 꽤 높거든요) 토요일 근무가 유동적이지 않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쓰기 워크숍도 가야 하고, 지인들과 주말 약속 잡기가 쉽지 않을 텐데. 토요일 격주에 3900이면, 지금 회사보다 퍽 좋은 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에 가자! 더 궁금한 것은 없냐고 물어보는 면접관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퇴근은 제시간에 하나요?
면접관- 6시인데, 10-20분 정도 뒤에 퇴근합니다. 저는 주 7일 근무하고요.
나- 네?? 사장님 이세요?
면접관- 사장 아들입니다.
네!!! 탈락입니다!! 사장 아들이랑 일 안 해요!! 직원이 자리를 잠시도 비우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차라리 사장님이 편하지.. 사장님의 아들과 한 부서에서 일한다...? 상상만으로 호흡이 곤란하고 근육이 경직된다. 더 궁금한 게 있었지만 질문할 필요를 잃었다. 면접을 마치고 나왔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최고라는 생각을 한번 더 하게 해 준 면접이었다.
회사야 복직할 수 있게 해 줘. 힘을 내주렴.
그리고 4일 뒤, 그로부터 카톡이 왔다.
-면접 내용 회의 결과 저희가 찾는 분야와 다른 것으로 사료돼 채용을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도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서류에서 탈락한 적은 많아도 면접 후에 채용거절은 처음이다. 난생처음으로 면접 후에 떨어졌는데 왠지 기분이 좋다. 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열심히 더 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