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듯한 하루, 읍내의 봄, 소망과 바람, 보기에만 좋았던 빵.
대망의 휴직!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비교할 타선도 없이 프리 다이빙이다. 나만의 작은 원칙이 있는데, 바다라는 게 그 속을 결코 알 수 없기에 결코 혼자서는 입수하지 않는다. 야간 다이빙은 조금 더 두렵기에 낮에만 다이빙을 한다. 그마저도 파도와 바람이 허락하는 날에만 입수가 가능해서 아직 몇 번 가보진 못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여름에 가까워지면, 동해안의 미역이 녹으면서 시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4월, 마음껏 다이빙하고, 마음껏 쉬어도 되는 지금이 최적기!
-미안, 언니가 이번 주는 시간이 안돼~ 다음 주에 같이 가자
아쉽게도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할 수밖에 없다. 화요일 집들이 7인상 / 수요일 저녁 울산으로 남편 픽업 / 목요일 서울행 기차 / 금요일 오전 회사 면접 / 토요일 경주 글쓰기 워크숍, 저녁엔 부산..
휴직한 거 맞아? 바다는 언제가? 해야 하는 일들 사이에 그 와중에 하고 싶은 것을 끼워 봐야겠다. 알람 없이 일어나기.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읽기. 이사 후 반년 간 미뤄둔 서재, 옷장, 수납장 청소하기...
4월의 첫날, 알람 없이 평소 출근 시간보다 25분 일찍 눈을 떴다. 소풍 가기 전날의 어린아이처럼 휴직첫날 너무 설레버린 탓이었을 터. 집안일을 빠르게 끝내고 남편을 출근시키고는 곧장 서재를 치우기 시작했다. 방하나를 서재로 이름 붙여놓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다. 서재의 책상은 켜켜이 물건이 쌓인 서랍이 되어가는 중.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으며 필사책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 시월쯤... 쓰는 삶을 살겠다며 구매한 필사책. 해가 바뀌고 4월인데 여전히 깨끗함을 유지 중. 이러다 누구에게 선물해도 되겠어. 나 참.. 실행력 없이 살아왔구나?
필사책의 한 장을 채운뒤 11시 50분 점심시간 알람을 맞추고는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했다. 방해 요소와 소음 없는 탓에 책장은 빠르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한 자리에서 책 한 권을 완독 하는 것은 내 오래된 소망인데, 알람소리와 비슷한 시간에 맞춰 그 일을 생애 처음으로 해냈다. 빵 몇 조각과 바나나, 계란, 두유를 적당히 섞어 먹고. 집안 곳곳을 서성이다 잠이 와서 잠을 잤다. 무너진 생체리듬은 금세 두통을 선물하는 법이었다. 이러다 저녁이 되어 버릴 거 같아... 휴직의 첫날을 집에서만 보낼 수 없다며 가방에 노트북과 배드민턴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라테 맛집을 궁서체로 크게 적어 베너로 만들어둔 읍내의 한 커피숍의 문을 열었다. (와중에 복잡한 시내대신 읍내를 선택함) 카페 직원은 황급히 이어폰을 빼고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한껏 커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화요일 세시반에 운동복 차림의 30대 여성 때문에 얼마나 놀라신 걸까. 잠깐 생각했다. 나 역시 그녀 때문에 적잖이 놀라서 카운터로 걸어가도 되는지 순간 망설였다. 그리고는 한마 터면 입안에서 맴돌던 말을 건넬 뻔했다. '놀라셨나요? 저도 이 시간에 카페는 처음이에요.'라고.
메뉴판을 빠르게 정독하고서. 아메리카노와 라테를 저울에 올려 다섯 번쯤 저울질하다 아이스라테와 그나마 먹을만해 보이는 빵 하나를 주문했다. 원두 갈리는 소리와 오븐기 돌아가는 소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민트색 트레이에 7700원의 커피와 빵이 올려져 있었다. 핸드폰에 뜬 휴직의 첫 소비 금액을 확인하고는. '7700? 왠지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아.'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라테 맛집은 인정. 빵은... 오늘 만든 거 아니죠?
이곳은 어느 공단아래 위치한 개인 카페다. 나는 그 공단 속에서 19년부터 삼 년을 일했었고 이 카페를 조금 안다. 회사로고가 새겨진 조끼 혹은 점퍼를 입고 카페 근처의 철물점을 자주 오갔었다. 철물점에서 회사로 돌아갈 때마다 저기 저 카페를 가고 싶다 소망했다. 점심시간 말고, 테이크 아웃 말고, 어느 평일 낮에 아무도 없는 저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특히나 봄일 때면 소망이 더욱 커졌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통창으로 바라보면 행복하지 않을까? 여유로운 저곳에서 쉰다면, 시간이 더 빨리 가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오늘, 육 년 전의 나의 작은 바람을 이루어 냈다. 계절은 그때와 같은 봄이고. 읍내답게 변한 건 거의 없다. 가슴 뻥 뚫리는 밭이 보이는 풍경과 아마 조금 더 자랐을 벚꽃나무가 그 자리 그대로 있다. 빵 맛은 다소 아쉽지만, 잔잔한 음악과 귀를 막지 않아도 충분히 조용한 공간에 마음이 점차 차분해졌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결코 떨어지지 않는 벚꽃나무와 그 뒤로 지나다니는 차를 한참을 쳐다봤다. 나만 멈춰 있는 기분. 입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원두향과 텁텁한 우유의 끝맛.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 천천히 논길을 따라 함께 걷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동안을 서성였다.
그때의 상상만큼 행복하진 않다. 조금 평안하고 조금 차분함. 그뿐이었다. 그래도 잘 왔다 싶다- 상상으로 그쳤던 소망을 이뤄내고 오래된 바람이 현실이 된 오늘을 잊지 못할 거다. 오늘 하루만 보더라도 휴직자가 아니라도 해낼 수 있는 하루였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것들을 기약 없는 다음으로 미뤄 두며 살아왔다. 올해 4월에는 좋아하는 일들을 하나씩 실현하는 삶을 살 거다. 그 일들이 사실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면, 직장인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카페를 떠날 채비를 하기 전, 오늘 하루가 고작 천 원 하는 소품(작은 배찌)에 담겨 오랜 시간 함께 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추가 지출을 했다.
휴직 첫날의 훈장. 그것에 뿌듯한 하루, 읍내의 봄, 소망과 바람, 보기에만 좋았던 빵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