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회의에 대한 단상
'터널이 제법 길겠다.
그 안은 빛은 희박하고 먼지가 날려오를 거야.
언젠가는 다가오겠지. 꼭 하나의 흰 점은.
작은 흰 점이 시야에 찍힌다면 터널의 끝이 보이는 것일 테니까.'
암흑은 시각의 영역인데 두려움의 질량에 호흡이 곤란할 것 같았다.
숨이 차오른다.
처음 오르는 산이 힘든 것은 어디로 얼마큼 올라야 정상에 이르는지 알 수 없다는 막막함에서 온다.
종아리부터 허벅지로 허리에서 등을 지나 목에 이르는 근육이 빽빽하게 긴장하고 어깨는 배낭끈에 쓸리며 호흡과 같이 버티는 복근 안쪽으로 허파는 찢어질듯한 비명을 지른다. 위장의 뒤쪽 옆 어디쯤에선 이름 모를 몸의 기관이 TV 화면조정 시간의 삐이 소리를 내며 약하고 지속적인 신호로 따끔따끔한 고통을 준다.
젖은 목덜미와 등에 붙은 티셔츠에서도, 벨트 아래 바지 바깥으로도 배어 나오는 땀이 느껴진다.
그래도 간다. 여기서 되돌아간다고 누가 뭐랄 것도 없지만 땅을 밀어내며 나는 가야 한다.
엄마는 나보다 더 힘들 테니까, 아플 테니까.
고행이 죄를 덜어준다는 상상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지만 내가 힘들면 그만큼 엄마의 고통은 경감될 거였고
나는 힘드는 이 과정을 바치고 유별난 사랑 표현도 한 적 없이 그저 무덤덤한 아들로 살아온 세월을 조금은 지우고 싶은 것이었다.
쨍한 추위에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상고대에 스치는 바람을 담고 싶었다.
오르내리는 길에 파란 하늘 초록색 이파리를 담으면 그걸 보내드리고 예쁜 꽃 멋진 풀을 담으면 그 생기를 보내드리고 싶었으니까.
내가 어릴 때 엄마가
사람이 살다가 어느 날 깨끗하게 딱 죽으면 좋겠다고 얘기한 날이 있었다
어린 나는 문득 무겁고 무서웠다
엄마 오늘 독한 주사 맞고 먼 데를 보고 계신다
슬픈 건 엄마가 아파서가 아니라 낯설어서다
엄마가 나를 보고 웃지 않는다
나는 또 무섭고 무거워졌다
이 문자를 휴대폰으로 친구에게 보냈다.
직접 먹을 갈아 화선지에 글씨를 쓰던, 글씨의 크기가 용두사미가 된 시조를 자취방 벽에 걸어놨던 친구에게.
그때가 산에 다닌 지 얼마나 지난 후였는지...
세브란스 병원 창밖을 보며 끄적였던 메모였다.
이어서 그 아래로 다시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오늘 새벽
어머니 돌아가셨어
원주의료원
토요일 발인
두 해가 가는 동안 최소 매주 한 번씩 산에 올랐고 내가 사는 도시 근교의 높고 낮은 산들을 모두 가 보았다.
등산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암 선고를 받고 어머니는 예의 깔끔한 성격대로 그리 길지 않은 투병을 마감하고 지난 오월 오셨던 곳으로 돌아가셨다.
조실부 하신 우리 어머니. 시집줄 때 따라오셨다던 엄마의 작은 아버지가 두메산골 귀틀집 전기 없는 무채색 움터에 엄마를 놓고 돌아가서는 한 열흘을 아무런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곡기를 줄이셨다는 소문은 눈물 바람에 실려오는 이야기지만 이제야 그건 먼저 가신 형님한테 면목이
없었다는 그분의 사죄 방식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김해 허 씨 외가는 집성촌이다.
거기선 복희가 화전촌 가난한 산골에 시집가서 고생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는데 그 복희가 울창타못해 시꺼먼 산중에서 낳은 하얀 아이가 바로 나다.
고조부였다든가. 이북에서 솥과 이불을 지고 내려오다 메밀꽃이 핀다는 그 평창 어디에 자리를 잡은 경주김 씨. 엄마는 그분이 퍼뜨린 혼기 찬 자손에게 시집을 와서
가세가 넉넉지는 않았어도 쌀밥을 먹고살았다던 외가인데, 옥수수를 맷돌에 갈아서 그것을 쌀 삼아 무솥에다가 강냉이 밥을 짓는, 찬이라고는 짠지밖에 없는 첩첩시골 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부모의 손과 발뒤꿈치에는 굳은살이 있었고 그 손과 발은 흙에 잠겼고 입성은 남루하였던 것이 분명하지만 몇 장 없는 사진으로 추측하면 말이 잘 안 되는 것은 흑백 필름 같았던 그 사진들에 어린 나와 내 동생은 언제나 분홍 파랑의 이쁘장한 옷을 입고 가지런한 앞머리를 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만큼 젊은 엄마는 손이 재바르고 머리는 영민하였다.
초등학교 삼 학년 이후로는 난 교과서를 펴 들고 부모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당황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지혜는 학교와 교과서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점은 훌륭한 사람 되라셨는데 유명한 사람 되라는 줄 알았던 나의 착각을 보아도 명확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상상보다 큰 슬픔이 밀려왔다.
엄마가 아프실 때 산으로 병원으로 강원도의 집으로 오가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슬픔이었으니 그것은 실제로 닥쳐온 부존재의 공허에서 기인한 것으로 하물며 사과 하나도 손으로 잡으면 뽀드득 소리를 내어주는 것인데 이제는 만질 수 없는 엄마, 주물러 드린다고 옆에 붙어있으면
너 힘드니까 고만하라던 음성과 아직 열 손가락에 남은 뼈와 거죽의 온기와 촉감이 그리워서 못 견디는 것이었다.
나의 일상은 변함이 없다.
식구들을 비롯한 주변의 누구에게도 내가 좀 변한 거 같다는 말, 어두워졌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나는 잘 웃는 편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려는 편이고 자연스러우려 노력하는 편이다.
표면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도 나다. 그리고 어디서 오는 무슨 미안함을 허전함을 어디에 떠들고 싶고 더 나아가 왜 살게 되어서 왜 죽는지를 저 산과 나무와 물은 의연하게 살고 죽는데 그 찬란한 시절을 알고 죽는가 하면서 청승을 떠는 것도 나다.
그렇지만 이런 마음을 펼쳐놓을 곳은 그리 많지 않았고 아니, 없었던 것이고 그저 끄적거리던 것들을 받아내던 이런저런 아무런 종이쪼가리가 속으로는 고함을 지르고 있던 나의 공터였고 가만있으면 가라앉으니 계속 손발을 움직여야만 하는 그 구급의 일환으로 책이라는 것, 그 안의 문장과 스토리에 기대어 나는 침잠하려는 관성을 부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단순히 말하자면 어디 가서 질질 짤 데가 없는 나는 내 사회적 포지션을 의식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울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반면 이 상태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솔직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유월이었나. 어쨌든 깊고 낮은 무거운 것들은 같은 색깔을 가졌는지 가사 있는 음악들이 슬프게 들려와서 울결한 심사를 찌르기 시작했기에 클래식 감상 모임이라는 데를 나가기 시작하기도 했다.
이런 것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진입하게 된 어두운 터널을 허우적대며 나아갈 때 전방 어디쯤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듣고 싶은 것과 이런 컴컴한 곳에서 뜬금없이 어떨 때는 드물게 반갑기도 했던 한줄기 옅은 다진 마늘 냄새 같은 걸 맡고 싶었던 것과 비록 환시라 할지라도 사람끼리 이리 저리로 움직이는 형체 같은 것을 느끼고 싶었던 마음과 결을 같이한다.
나는 대책이 있어야 했던 것이었다. 이 삶의 의문과 슬픔과 센 것과 여린 것과 형체와 형체 없음과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은 어린아이의 영혼은 무슨 까닭으로 죽는지 그래서 한때는 신은 없고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또 그렇기에 신이 있어야 하고 신의 섭리가 요청된다고 생각하는 이 모순을 같이 고민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떤 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지만 여기 이 대책을 회의하는 곳에는 들어주고 봐주고 오냐오냐 그랬구나 어리구나 또 여리구나 해주는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웅성웅성 있었다.
뭔가 대단한 시너지의 폭발이 있을 줄 알았니
그렇게 감성으로 만나 눈빛으로 통할 줄 알았니
우리의 신체는 발성기관을 거쳐 음식물을 내리게 되어있더라
씹으며 삼켜가면서 말도 하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니
구체성을 보여주랴 조금 부끄럽진 않았니
그런데 이런 공통분모를 애잔해하려니 다시 정이 가진 않더나
자기 전에 한 번 씨익 웃게 되지 않더나
모임이라는 것을 나가기 전에 설렘을 누르며 올 지도 모를 실망을 상상하면서 적었다.
이런 건 나에게 백신이다. 예상치 못한 바이러스에는 그냥 말없이 앓는 타입이니까.
웅성웅성 있던 사람들이 실체로 다가오면서 이 사람들, RH 마이너스의 피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면 서로 말이 없어도 그 고충을 이해하듯이 내 글도 나도 긍정의 눈으로 받아 줄 수 있는 반발력 없는 수용의 마음을 가졌다고 느꼈다.
'그래 나아갈 힘이 난다.'
그 누가 또는 어느 높은 님께서 설계했든지 동굴이 아닌 터널이라고 부른 이상 끝이 있음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흰 점이 눈에 들어오고 거기에서 맑은 바람도 올 것이며 그 터널을 나올 때 한 손을 이마에 대고 눈이 부신 햇살을 차양처럼 막으며 터널을 지나온 감각을 기억하고 두려움을 추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