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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독후감

by 열목어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분위기를 지닌 어린 골드문트는 수도원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교사를 겸임하던 선배인 나르치스의 견고한 이성과 방대한 지식과 냉철한 태도에 반하게 되고 나르치스 또한 골드문트의 순수함과 풍부한 감성에 매료된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닮고 싶었으나 나르치스처럼 신앙에 온몸을 의지하며 절제 속에서 신을 찬양할 수 있는 본성이 자신에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감성의 외피에 감추어진 모험과 충동의 본능을 타고난 사람이었고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의문과 욕망을 찾아 수도원을 떠나 방랑의 길을 선택한다.


우연히 눈뜬 이성과의 육체적 경험은 골드문트를 탐미의 세계로 인도하게 되었고 많은 여성을 만나며 인생에서 다른 축의 기쁨을 찾아 헤매었으나 그의 마음 한 켠엔 어린 시절 자신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모성에 대한 갈망이 잠재해 있었고 그 갈망은 다시 여인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추위와 더위, 비와 눈과 들짐승을 피해 들과 숲에서 노숙하고 마을을 만나게 되면 며칠 정도 잠자리를 얻어 지내는 생활에 길들여지면서 자연으로부터 오는 경외와 우연히 맞닥뜨리는 사건들이 주는 새로운 자극에 서서히 중독되어 간다.

무의식과 의식, 이성과 감성, 머무는자와 떠도는자의 경계를 방황하다 어느 순간 그는 그의 욕망이 예술로 전이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그가 그리거나 깎아서 나타내고 싶은 것은 그의 영혼을 차지한 높은 것들의 응축이었고 그것은 그의 경험과 경험 중의 인물, 사건과 그 사건에 따라 얻게 된 비애와 환희의 승화된 기억이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첫 번째의 조각은 나르치스의 모습으로부터 온 영감으로 완성되었으나 이별이 예정된 사랑은 흐르는 시간 앞에 무색해지는 것과 같이 혼신을 다한 작품도 고갈된 영감 앞에 허무해져 버리는 경험 끝에 그는 다시 감성을 따라 방황하며 본능에 몸을 맡기고 위기와 위협으로부터 생존해 가면서 삶이라는 것을 몸으로 터득해 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죽은 채 방치되는 집들과 그 울타리에 묶여 굶어 죽는 개들.
수레에 실려 한꺼번에 매장되는 시신 속에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들이 섞여있다.
골드문트는 여인의 환희에 찬 얼굴과 출산의 고통을 견디는 얼굴과 죽음에 직면한 임종의 얼굴에서 이 모두를 관통하는 동질감을 느낀다.
이는 육체라는 물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특징이자 그런 인간이 자연의 섭리에 조우하는 반응이어서 나무의 나이테처럼 어떤 조건이 되면 자연스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고통과 쾌락과 죽음은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만 사실 그 양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는 어렴풋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인간은 앞다투어 죽을 뿐 영원히 살지 못하는 데도 흑사병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여전히 배는 고프고 살고자 하고 살아있는 이들끼리 도모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비애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상실의 분노와 슬픔에 대한 원망의 화살을 약자에게 겨눠 다시 또 다른 살육이 벌어져도 골드문트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의문에, 표면적으로는 여인의 향기에 이끌리며 거기서 회생의 기운을 느끼고 다시 삶의 활기를 찾는다.

따라간 향기 끝에 맞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골드문트는 오히려 명확하게 감각할 수 있는 생명에 대한 의지, 살려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겠다는 강한 집념과 또 그 의지는 의심의 여지없이 실현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런 종류의 확신은 젊음의 배경이 어느 순간, 어느 상황에서 불어넣어주는 자신감이며 그런 자신감은 적어도 한 번은 기적에 가까운 성취를 이뤄내는 법인 듯하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오는 길. 그가 돌아갈 곳은 수도원이었고 그 길에는 나르치스가 함께한다.

나르치스는 생각한다. 나르치스는 스스로 규율과 지식과 절제 안에서 살며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맛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골드문트가 자유와 명예, 생에 대한 의문을 멈추지 않고 부딪치면서도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모습에서 깊은 신뢰와 애정을 느끼게 되며 이는 그 스스로가 침묵과 명상 속에 이뤄낸 것과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깨달음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결여된 부분을 서로 갈구하였던 것이고 본인이 살아보지 못한 삶을 알고 싶었던 것이었고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길에 존경과 인정이 들어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던 것이다.

시간은 흘렀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노년에 결국 그들이 서로 지혜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의 유사성을 발견하듯이 인생은 방향과 궤도를 갖고 있으며 방랑을 끝낸 골드문트의 얼굴은 다른 무상한 모든 것들처럼 늙었으며 수행의 높은 단계에 이른 나르치스의 마음에도 거친 파문이 일었다.
소년 시절, 이해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의지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하고 반면에 그 눈빛이 너무 샅샅이 나를 파악하는 듯 한 반감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적절치 않은 표현으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 또한 서로의 범주에 진입하기 위한 애정 어린 진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시절에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었다면 그를 영원히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무상과 회귀의 긴 시를 함께 읽은 영혼의 친구였다.


이 책의 예전 제목을 알고있었다.

'지와 사랑' .

좋은 제목이다. 그러나 지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원제 그대로의 번역을 쓰는 이유도 알 거 같다.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은 소설의 내용을 다 담지 못한다.

지금 처럼 누구 누구가 책 겉면에 짤막한 서평을 써준다면 아마도 이런 류의 평을 적을듯 하다.


"동서양의 정신에 대한 탐구,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사색이며 정신분석학을 배경으로 한 금욕과 영혼, 본능과 육체에 대한 균형의 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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